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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최재천의 자연과 문화] [522] 미생물생태학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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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1976년은 내 인생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전환기였다. 일찌감치 공부와 담을 쌓고 지내던 나를 같은 과 친구들이 덜컥 대표로 뽑은 것이다. 한사코 손사래를 쳤건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엉겁결에 떠맡은 과대표 일을 하면서 나는 서서히 학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가을에 열린 전국 대학생 생물학 심포지엄에서 나는 논문까지 발표하는 만용을 부렸다. 물론 이 역시 등 떠밀려 한 것이지만 그때 그 논문 주제를 나는 지금도 연구하고 있다.

모든 것은 1967년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의 세포공생설에서 시작됐다. 세포 내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원래 독립적으로 생활하던 박테리아였는데 더 큰 박테리아 안에 들어가 공생하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에 매료되어 당시 서울대 도서관에 있는 거의 모든 관련 논문을 죄다 찾아 읽었다. 그리고 먼 훗날 나는 서울대 교수가 되어 헌법재판소에서 바로 이 이론(미토콘드리아의 여성 유전)을 바탕으로 남성 중심의 '호주제'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마굴리스의 연구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이제 생물학은 세포 수준을 넘어 개체 수준의 공생을 연구하고 있다. 키, 체중, 나이, 성별에 따라 다르긴 해도 인간 어른은 대개 30조 개의 인간 세포와 39조 개의 미생물 세포로 이뤄져 있다. 세포 수로만 보면 나는 진정 내가 아니다. 거대한 미생물 생태계와 손잡은 공생체다.

이 같은 공생 미생물은 피부, 구강, 기도, 식도, 위, 소장에도 분포하지만 대장에 가장 많이 산다. 지금까지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의 소화는 물론 면역, 호르몬, 심지어 두뇌 활동에까지 관여한다. 2016년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국가 마이크로바이옴 계획’을 수립해 공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대 생명과학부 천종식 교수가 한국인의 미생물 유전자 데이터를 모으는 시민과학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미생물생태학의 시대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사회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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