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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이굴기의 꽃산 꽃글]노랑무늬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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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불석권(手不釋卷), 잠시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머리에 철들 무렵 부친한테 참 많이도 들었던 사자성어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와 접촉하는 첨병이었던 손. 그 손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무엇일까. 아무리 열중한다 해도 손바닥에서의 일은 잠깐이었다. 본래 인생은 잡는 데 있지 않다는 걸 암시하면서 그곳은 늘 텅 비어 있었다. 한동안 열망했던 너는 잡힐 듯하다가 그냥 스쳐가고 말았지. 끝내 나의 손을 외면하고 말았지.

요즘 식당에 가면 빈자리는 많아도 빈손은 없다. 모두들 그것을 들고 그것에 빠져 있다. 음식이 나와 젓가락을 잡기까지의 자투리 시간도 그냥 두지 못한다. 배꼽 없는 이가 없듯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손을 장악하였다. 스카이, 갤럭시, 안드로이드, 구글 등 하늘과 관련된 용어를 주로 사용하는 그것들. 이 짝퉁하늘에 고개를 박고 사느라 고개 들 겨를이 없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이는 손바닥 안의 그것! 손안을 만지작거리다가 급기야 몸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과 그것을 치환해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신통하게도 여러 현상들과 똑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이내 책의 죽음, 하늘의 죽음, 대화의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그것의 바탕화면 캘린더에는 생일과 더불어 나의 기일도 분명히 들어 있다. 그러니 어쩌면 죽음의 척후병이 미리 이렇게 구체적으로 현현한 게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짐작하다시피 그것은 휴대폰이다. 이번 주말에도 나는 잠시 생활에서 이탈하는 방법으로 산을 택했다. 카메라를 메고 휴대폰도 챙겨서 홍천의 어느 깊숙한 계곡을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꽃도 많지만 떠오르는 궁리도 많다. 어느 나무의 겨드랑이에 숨어 있었던가. 집이라면 짐작조차 못했던 문장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적, 인적 드문 자갈밭 귀퉁이에서 노랑무늬붓꽃을 만났다. 보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저의 자리를 지키며 정갈하게 피어난 노랑무늬붓꽃. 품안의 거울 꺼내 보듯 그것도 한번 생각해보면서 꽃동무의 그것에 찍힌 노오란 노랑무늬붓꽃을 찍어보았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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