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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여성 혐오범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개인 문제로 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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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3주기-한국에도 혐오범죄 있다]②판결로 본 여성 혐오범죄

경향신문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3주기인 17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시민들이 헌화한 꽃과 추모글이 놓여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jeon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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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대상에 ‘약자’ 부각하고

가해자 개별 특성에 원인 돌려

혐오범죄에 대한 연구 부족

여성 피해 정도도 파악 못해

젠더폭력 관련 지침 마련 등

사회적 논의·연구 계속돼야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 혐오범죄입니다.” 2016년 5월17일 김모씨가 남성 6명은 그대로 보내고 여성을 살해한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경찰과 법원은 이 사건이 ‘여성 혐오범죄’란 걸 부정했다.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여성을 혐오했다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해의식으로 인해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2·3심에서도 혐오범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범인 김씨에겐 징역 30년이 확정됐다.

경향신문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법원에서 나온 판결 중 ‘혐오’ ‘증오’ ‘편견’ 키워드가 포함된 사례를 조사해봤다. 특정 사건을 여성 혐오범죄라고 명확히 규정한 사례는 없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원한 관계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한 혐오가 범행 기반이 됐다는 점을 일선 판사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부분은 확인했다.

최근 사례다. 지난해 8월17일 전북 전주의 한 편의점 근처에서 17세 여성을 발견한 ㄱ씨는 일주일 전 이별 통보를 한 여자친구의 뒷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화가 나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른손에 벽돌을 들고 이 여성의 뒤를 따라가다 인적이 드문 지점에서 뒷머리 부분을 내리쳤다. 다른 혐의로도 함께 기소된 ㄱ씨에게 전주지법 형사2부(재판장 박정대 부장판사)는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서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나 무차별적인 폭력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불특정한 여성을 상대로 한 이러한 범행은 위험성이 높다”며 “사회적 불안과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으로서 죄질이 불량하고 비난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사건에서도 ‘혐오’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취약한 지위의 이주여성이 범행 대상이 됐다. 2006년 베트남 여성과 한 차례 결혼했다가 다른 국적의 이주여성과 재혼한 ㄴ씨는 별다른 근거 없이 전처가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던 것 같다는 망상에 빠져 재혼한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ㄴ씨는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으라’는 아내의 말에 자칫 자신이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지난해 12월 살해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이 두 사람 간 사적 갈등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보복성 살인을 한 게 아니라고 봤다. 울산지법 형사12부(재판장 김관구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머나먼 이국땅에서 피고인만을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던 결혼 이주여성인 피해자를 살해했음에도 그 살해 동기가 불분명하고, 피해자가 유발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들고 있는 피해자를 살해한 이유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며 “결국 피고인의 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편견, 멸시, 혐오 감정 등이 작용해 범행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길을 지나가는 여성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때린 사건을 ‘여성 혐오에 기반한 묻지마 폭행’으로 보고 실형을 선고한 춘천지법 판결도 있었다.

여성이 범행대상은 아니지만 폭력성이 드러난 사례도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 쪽지를 붙이기 위해 만든 하드보드지 게시판 20개를 은닉한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회원 ㄷ씨는 재물손괴죄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다. 고진흥 대전지법 판사는 “ㄷ씨는 아무런 이유 없이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용한 게시판을 자신이 가입해 활동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등급을 올리겠다는 의도를 갖고 남성 혐오적 의견이 있다는 이유로 훼손하고 은닉했다”며 “범행동기 및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한 불관용적 태도, 범행으로 침해된 시민 공중의 추모감정 및 의견, 이 사건 범행의 사회적 의의 및 정신적 폭력성 등에 비춰보면 피고인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고 양형이유에 적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처음 보는 여성을 폭행한 것은 여성 혐오범죄라며 벌금 30만원이 너무 가볍다고 검사가 항소했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도 있다. 서울남부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강태훈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신체장애를 가지고 있어 피해자가 보인 ‘재수 없다’라는 반응에 격앙된 것으로 보일 뿐 여성 증오범죄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법조계에서는 여성 혐오범죄가 존재하느냐를 두고 양론이 있다. 젠더폭력의 관점에서 충분히 여성 혐오범죄를 규정할 수 있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과, 여성이라기보다는 약자이기 때문에 범행 대상이 됐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여성 집단 자체에 대한 반감이 범행의 주된 동기는 아니라는 의견이 대립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씨가 조현병으로 심신미약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여성 혐오범죄로 지목되는 사건들의 원인을 조현병으로 돌리는 주장도 최근 많아지고 있다.

허미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사회에서 혐오가 어떻게 통용돼왔고, 어느 지점에서 합의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하는데 혐오범죄에 대한 축적된 연구가 부족하다”며 “강남역 살인사건도 외국의 요건으로 봤을 때는 혐오범죄에 해당하지만 한국은 명확한 지침도 없이 (조현병과 같은) 개인 문제로 치부해왔다. 오히려 사회가 손쉽게 (혐오범죄 문제를) 처리해온 것”이라고 했다. 허 조사관은 “통계조차 구축돼 있지 않아 어느 정도로 (여성들이) 피해를 입는지 파악되지 못하는 상태”라며 “법원이 여성 혐오범죄를 인식했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소수의견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미국의 상당수 주에서는 인종·종교·민족·성적취향·장애뿐만 아니라 ‘성별’을 예방해야 할 혐오범죄 항목에 포함한다.

◆‘강남역 살인’ 3주기…“묻지마 살인은 없다, 그는 여성이라 남성에게 죽었다”

시민들, 흰 장미 들고 ‘추모제’

숨진 날 기려 5분 17초간 침묵

“지금도 개선 안되고 있다 생각”


2016년 5월1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근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이 살해됐다. 여성을 노린 계획적인 범죄였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 수천개가 10번 출구에 붙었다. 3년 후인 이곳을 수놓은 건 흰색 장미다.

17일 오후 열린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 3주기 추모제 ‘묻지마 살해는 없다’ 주최 측은 추모객들에게 장미를 나눠줬다.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고 쓰인 피켓도 쥐여줬다. 시민들은 검은색 옷을 입고 추모제 장소인 강남스퀘어 앞에 모였다.

오후 7시 추모제가 시작됐다. 주최 측은 숨진 20대 여성을 위한 헌정 시를 읊었다. “다시 강남역에서 5월17일 그날 강남역에서 너에게 일어난 일은 어쩌면 기삿거리/ 묻지 않고 죽였다고 했지만 …/ 그가 여성이라서 남성에게 죽었다…/ 너는 나다.” 이어 참가자들은 여성이 숨진 5월17일을 기리며 5분17초 동안 침묵했다.

참가자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단상에 오른 한 여성은 “3년 전 묻지마라고 수식된 혐오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며 “더 이상 이런 범죄가 일어나지 않기 위해 싸우게 됐다”고 말했다. 한 남성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혐오가 만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지금도 개선이 안됐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이 사건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왔다”고 했다.

자유발언을 마친 뒤 두 손에 흰 장미와 피켓을 든 시민들은 10번 출구로 걸어가 헌화했다.

주최 측은 여성 대상 범죄가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계획적인 혐오 범죄라는 것을 알리려고 추모제를 기획했다. 기획자 중 한 명인 불꽃페미액션 한솔 활동가는 “이 사건으로 여성 혐오 범죄가 거의 최초로 이슈화됐다. 큰 분기점이었다”고 말했다.

추모제 시작 30분 전 이곳을 찾은 안경민씨(23)는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이 사건이 단발적인 분노로 끝나지 않고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이날 논평을 내고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은 여성들이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우리는 더 이상 우연히 살아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원한다. 성별을 이유로 한 죽음과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 성평등이 실현되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혜리·고희진·박채영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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