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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치우친 무게중심을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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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스쿨 미투’ ‘천 개의 낙태’ 등 다루며 여기의 세상과 함께 숨쉬는 <거리의 만찬>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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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문제제기의 시작점은 성비 불균형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이것이 단지 연예 오락 프로그램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 시사 교양의 영역에서도, 아니 그러한 영역일수록 여성은 자연스럽게 배제돼왔기 때문이다.

저출산 토론 벌이는 남성들

지난해 건축가 김진애 박사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남성 일색의 ‘교양 예능’에 대해 “영향력 높은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존재가 안 보이면서, 의제-토의의 시각뿐 아니라 대중의 편견을 강화하는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내거나 전문가로서 권위를 갖는 여성을 방송에서 볼 기회는 매우 드물다. 그 대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얼마 전 방송된 tvN <상암타임즈>처럼 저출산 상황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출연자 8명이 전부 남성이라든가 하는 황당한 광경이다.

그래서 지난 3월29일 방송된 KBS1 <거리의 만찬>에 출연한 윤지오씨의 말은, 여성 엠시(MC) 3명이 시사 이슈로 이야기 나누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자 차별성과 정확히 맞닿았다. 동료 배우 장자연씨가 겪었던 성폭력 사건의 증언을 위해 캐나다에서 귀국한 뒤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외출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밥은 잘 먹어요?”라는 박미선의 인사에 갑자기 긴장이 풀린 듯 울음을 터뜨리며 한국에 와서 마카롱을 처음 본다고 털어놓은 뒤 덧붙였다. “이렇게 많은 여자분이랑 있는 것도 처음이에요.”

모처럼 ‘많은’ 여자 3명은 남자 3명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최근의 MBC <100분 토론>이 종종 보여주듯 정치 시사 프로그램에서 ‘균형’이나 ‘중립’이란, 대개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문제를 다룰 때 여성 전문가들과 동수의 남성 전문가(혹은 비전문가)를 섭외해 발전적 토론 대신 논의의 초기화나 혐오 발언 확산의 장을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젠더 이슈’가 아닌 경우 여성 패널을 남성과 동수 혹은 비슷한 비중으로 맞추려는 노력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거리의 만찬>은 달랐던 출발점에 이어 과감한 지향점을 제시한다. 박상욱 피디는 최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시사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찬반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태도는 지양하려고 한다. 우선 만날 분들은 자기 목소리를 전할 방법이 없던 사람들이다. 무조건 ‘중심의 한가운데’에 서는 게 아닌,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옮길 수 있는 생각을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이 시대 시민과 어른의 역할

무게중심을 옮기기 위해서는 기울어진 곳을 찾아야 한다. 지난해 여름,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투쟁 현장에서 파일럿 방송의 막을 올렸던 <거리의 만찬>은 곧이어 ‘낙태죄’ 문제를 다루었다. 임신중지를 경험한 여성들과 산부인과 전문의가 출연해 낙태를 둘러싼 선입견과 잘못된 정보, 여성들이 부당하게 겪어온 고통에 대해 말했다.

4월12일 방송된 ‘아이 캔 스피크’ 편에서도 ‘스쿨 미투’ 운동을 통해 남성 교사들의 성폭력을 고발한 학생들이 직접 출연했다. 연출자 이승문 피디는 “‘천 개의 낙태’ 편을 준비할 때도 그랬듯, 당사자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출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학생들을 만나보니 의외로 ‘괜찮다’고 해서 절차상 부모님 동의서도 받아 촬영을 진행했다. 그동안 뉴스 인터뷰에서는 피해 사실과 현재 입장 정도만 간단히 나왔다면, <거리의 만찬>에서는 ‘스쿨 미투’라는 운동 자체와 이 흐름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평생 그게 학교 담장 밖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어요” “(가해가 일어난) 그때 말하지 못했을 뿐, 시간이 지났어도 중요한 건 내가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이잖아요” 등 고발자들의 날카롭고 정확한 증언은 이들의 경험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엠시들의 목소리와 이어졌다. “그 선생님 만나러 간다!”며 팔을 걷어붙여 학생들을 웃게 한 이지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에게 대책을 묻고 촉구한 박미선은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자 어른의 역할을 환기했다.

이승문 피디는 “여성 엠시라서 더 감정적으로 말한다거나 눈물을 보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새로운 판이 깔리니까 초대손님들도 자신의 언어로 좀더 부담 없이 이야기해준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주류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 주제를 선정할 때도 우리 엠시들을 믿고 가보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 캔 스피크’ 편의 녹화 직후인 3월28일, ‘스쿨 미투법’이라는 사립학교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성범죄를 저지른 사립학교 교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막고자 사립학교 교원징계위원회가 국·공립학교 교원과 같은 징계 기준을 따르도록 한 내용이다. ‘천 개의 낙태’ 편이 방송된 지 5개월 뒤인 4월11일에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났다.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가 좋아요

이처럼 ‘지금, 여기’의 세상과 함께 숨 쉬는 <거리의 만찬>은 새 엠시 양희은이 합류하는 ‘제주4.3’ 편에 이어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 편을 방송할 예정이다. 물론 금요일 밤 10시, 쟁쟁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사이의 시청률 경쟁은 절대 만만치 않다. “스타벅스 매장 다섯 개 사이의 이름 없는 커피숍 같은 처지”라는 농담까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제작진은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기 위해 인스타그램(@road_dinner), 브런치, 유튜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수신료로 만들었습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그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구독’과 ‘좋아요’로도 계속 만들어질 힘을 얻을 것이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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