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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일하다 아픈 아빠 날 때부터 아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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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LGD 공장서 화학물질 다루다 백혈병 걸린 김기훈씨네 찾아온 불행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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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백혈병, 아들은 종합장애 2급.

김기훈(34·가명)씨와 아들 동현(5·가명)에게 불행은 겹으로 찾아왔다. 모두 기훈씨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할 때 벌어졌다. 이제 회사는 떠났지만 질병은 평생 함께해야 한다. 기훈씨는 올해 초 본인의 백혈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 신청을 했다.

노인들 걸리는 희귀병 앓는 30대 노동자



기훈씨는 LG디스플레이 경기도 파주공장에서 2010년 10월부터 7년6개월간 일했다. 액정표시장치(LCD)를 만드는 설비를 유지·보수·수리하는 테크니션(기술자)이었다. 건식식각 공정에서 장비 24개에 붙어 있는 챔버 95개를 관리했다. 기훈씨는 산업재해 신청서에서 “점심시간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쉬는 시간이 없고, 월평균 60시간 이상의 연장근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밤샘근무를 포함해 4조3교대 또는 4조4교대로 일했다.

일반적으로 LCD 제조공정에선 유기용제, 가스, 무기산, 금속 등 많은 화학물질을 사용한다. 엑스선(X-ray), 자외선(UV), 전자파도 나온다. 특히 기훈씨 같은 테크니션 노동자는 다양한 장비를 다루면서 잔류 가스, 세정제, 부산물 등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법원이나 근로복지공단에서도 LCD 제조공정으로 인해 백혈병, 뇌종양, 다발성경화증 등 다양한 질병이 생길 수 있다며 노동자의 직업병을 인정한 사례가 있다.

기훈씨도 장비 내부에 묻은 오염물질을 닦을 때 탈이온수(DI), 아세톤, 이소프로필알코올(IPA), 에탄올 등을 썼다. 이때 화학반응으로 생겨난 기체나 장비 내부에 남아 있는 역한 냄새를 맡는 일이 종종 있었다. 방독면을 쓰면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해서 방독면을 쓰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2017년 7월, 기훈씨는 병원에서 T세포대과립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받았다. 백혈병 중에서도 희귀한 종류였고 보통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생기는 병이었다. 기훈씨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없었다. 1년 넘게 약을 먹으며 치료받았지만 완치되지는 않았다.

LG디스플레이에서 허락한 휴직 기간은 최대 270일이었다. 병이 재발한 경우 더 연장할 수 있지만, 기훈씨는 애초 병이 낫지 않은 상태라 재발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2018년 5월 퇴사했다. 기훈씨는 병에 걸려 퇴사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저처럼 완치가 어려운 병은 회복될 때까지 휴직을 줬으면 좋겠어요.” 기훈씨는 최근 몸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취직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기훈씨만 아픈 게 아니었다. 아들 동현이는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각막혼탁증이라 눈이 하얗다. 양쪽 귀에 난청이 있어 보청기를 껴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뇌병변으로 지적장애도 있었다. 2015년, 신생아 평균보다 1㎏ 이상 적은 체중(2.18㎏)으로 태어날 때부터 동현이는 여러 질병을 안고 있었다. 기훈씨는 자신과 아들의 질병이 LG디스플레이 사업장의 작업환경과 관련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들도 이렇고 저도 이렇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첨단전자산업 분야에서 직업병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주장은 늘 평행선을 달린다. 회사는 유해물질이 법정 기준치 이하로 안전하게 관리된다고 하고, 노동자는 실제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유해물질의 상당수가 제대로 측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삼성과 LG의 생산라인을 연구해 2016년 11월 발표한 ‘LCD 제조공정 유해요인 특성 연구 Ⅲ’(이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LCD 제조공정에서 쓰이는 화학물질 중 20% 정도만이 작업환경 측정 대상에 들어간다. 연구보고서는 “감광액, 배향액, 세정액 등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상당수가 아직 노출 기준도 설정되어 있지 않은 물질”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유해물질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순간에도 측정은 이뤄지지 않는다. 연구보고서는 “(LCD 공정에서) 생식독성 관련 물질 등이 검출되었으나 농도 수준은 노출 기준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면서도 “PM작업(기훈씨 업무)을 수행하는 일부의 경우에 정상 작업시보다 수배∼수십배 이상의 농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사업장의 안전이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한 LG디스플레이는 ‘산업보건 지원보상운영위원회’(이하 보상위)를 만들어 2017년 7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자사 사업장에서 1년 이상 일한 전·현직 임직원과 상주 협력사 직원 중에 암이나 특이 질병에 걸린 경우 업무연관성과 상관없이 지원 보상하고 있다. 기훈씨도 백혈병으로 보상위에서 5천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아들 동현이의 질환에 대해선 받지 못했다. 현재 자녀 질환은 선천성 심장질환과 소아암만 보상 대상에 포함된다. 보상위 위원장인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보상위를 만들 당시 반도체 직업병과 관련해 연구했던 질병, 조금이라도 관련성이 드러난 질병은 모두 포함했다”고 밝혔다.

자녀 질환으로는 산업재해를 신청할 수도 없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노동자 본인의 피해만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도체 노동자의 자녀 질환은 사각지대에 있다. 특히 남성 노동자가 생식독성물질을 다뤄 선천성 질환아를 낳은 사례는 연구조차 이뤄진 적이 없다.

남성 노동자의 선천성 질환아 출산 연구는



여성 노동자의 선천성 질환아 출산도 최근에야 첫 연구가 이뤄졌을 뿐이다. 고용노동부가 우송대 산학협력단에 연구용역을 맡겨 2018년 12월10일 받은 ‘자녀 건강 손상에 대한 산재보상 방안’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16살 이상 40살 이하 가임기 여성노동자 354만575명 중 3%인 10만6669명이 생식독성 유해물질을 다루며, 이들이 선천성 질환아를 낳을 확률은 일반 가임기 여성 노동자보다 33% 더 높았다. 남성 노동자는 얼마나 생식독성물질을 다루는지, 이들의 자녀는 선천성 질환을 얼마나 가지고 태어나는지 연구된 바 없다. LG디스플레이 쪽은 기훈씨의 산재 신청에 대해 특별한 반론 없이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에 따르겠다”고 <한겨레21>에 밝혔다.

글·사진 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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