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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주강현의 바다, 문명의 서사시]‘수평 막대 달린 선박’ 새긴 부조, 대양 항해 문명 교류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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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항해의 주역, 아우트리거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선조는 아시아인

<어린왕자>의 바오바브나무가 서 있는 마다가스카르. 사실 바오바브나무는 마다가스카르뿐 아니라 모잠비크, 케냐,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 넓게 분포된다. 실제로 케냐에서 탄자니아로 내려가는 해안 곳곳에서 드문드문 서 있는 바오바브나무를 목격하게 된다. 바오바브나무는 마다가스카르에만 서식할 것 같다는 편견에서 벗어날 일이다.

여하간, 인도양에 떠 있는 마다가스카르 거대한 섬의 고립된 환경과 독특한 경관은 무궁한 판타지를 부여한다. 마다가스카르는 문명 교류의 숨겨진 비밀의 섬이라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마다가스카르는 지리적으로 최단 거리인 모잠비크까지 400여㎞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인이 지배적이고, 아프리카 문화권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우리의 통념은 막상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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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부두르 사원의 무수한 벽면 부조 중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증거를 담은 부조가 있다. 자바에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로 연결되던 뱃길에 사용된 거대한 아우트리거를 담은 이 부조는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 문명 교류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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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구성을 보면 고정관념이 깨진다. 말레이-인도네시아인이 주도적이다. 초기에 인도네시아에서 인도양을 가로질러 정착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르면 250년, 늦어도 350~550년 사이에 성공적으로 도착했을 것으로 본다. 대항해에 유리한 아우트리거(Outrigger)로 인도네시아 남부에서 왔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인도네시아인이 대서양을 횡단해 마다가스카르로 흘러왔다.

인도네시아 이주민은 연안의 열대우림에서 화전 경작을 시작했다. 적어도 600년 무렵에 이르면 초기 정착자들 손에 의해 중앙고원의 열대우림까지 개척되었다. 7~9세기 사이에야 아랍 무역 상인이 인도양을 남하해 섬에 도착했다. 아랍인은 코란을 들고 북서해안에 당도해 이슬람을 전파시켰다. 반투(Bantu) 언어를 구사하는 아프리카 이주민은 1000년 무렵에야 당도했다. 15세기부터는 최초의 서양인인 포르투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탐험가 디아스(Bartolomeu Dias)가 서양인 중 최초로 섬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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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남부 갈레 해안의 아우트리거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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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기 조성 보로부두르 부조

자바~마다가스카르 뱃길 선박

현재도 사용 ‘아우트리거’ 선명


인도네시아인, 마다카스카르로

초기에 인도양 가로질러 정착

7~9세기엔 아랍 무역상인 도착


폴리네시아인 태평양 횡단 역사

아우트리거 카누가 중심 역할

선박양식으론 동일 문명권인 셈


1600년대까지 마다가스카르는 인도양에서 여러 중요 항구를 연결하는 무역 허브항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프랑스인이 이후 18세기에 도착하면서, 식민화가 강화되고 내륙의 흑인들을 이 섬으로 ‘이식’했다. 그래도 여전히 주민의 상층부는 인도양을 건너온 아시아인 몫이었다.

오늘의 주민 구성은 말레이-인도네시아족, 말레이-인도네시아-아프리카 혼혈족, 프랑스인, 백인과의 혼혈인 크리올(Creole) 등이다. 문화적으로는 인도네시아와 아랍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앙 고원지대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족, 남서쪽에는 뒤늦게 당도한 아프리카인 후손이 거주한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마다가스카르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일찍이 고대 인도네시아 흔적을 다수 확인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 문명 교류의 증거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도네시아 자바섬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에서 결정적 증거가 발굴되었다.

■보로부두르 부조의 비밀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도 욕야카르타(Yogyakarta)는 특별한 곳이다. 이곳에 들르는 외국인은 으레 보로부두르 유적을 찾기 마련이다. 보로부두르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불교 사원의 하나다. 8~9세기경 사일렌드라(Sailendra) 왕조시대에 조성되었다. 사원은 10세기까지 근 5세기 동안 자바를 지배하던 사일렌드라 왕조의 다이내믹한 순간을 보여준다.

사일렌드라 왕조는 붓다와 자신들 왕의 영광을 위해 보로부두르를 만들었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보다 300년 빠르고, 거대 유럽 성당이 시작되기 400여년 전이다. 적도의 엄혹한 기후 속에서 6만㎥의 돌을 옮기고 깎은 초대형 토목공사와 노동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불교적 세계관의 만다라를 표상하여 우주가 3개의 국면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축조되었다. 양식상으로 볼 때 보로부두르 예술은 인도 굽타와 후기 굽타 양식의 영향이다. 인도양을 통한 인도 문명과의 접촉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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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심장한 해양문명사의 의의를 간직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불교사원 보로부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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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경 이 거대한 사원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졌다. 인도네시아는 어느 결에 이슬람의 땅으로 변해 더 이상 불교는 의미가 없어졌다. 게다가 중앙 자바의 정치적 상황이 이 사원을 잊게 만들었다. 유적은 화산재에 가려졌으며 정글에 숨겨져 원숭이 놀이터로 변했다. 이후 19세기에 식민 통치자 네덜란드인 손에 의해 재발견되고 20세기에 복원된다.

보로부두르는 의미심장한 해양문명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만다라로 조성된 무수한 벽면의 부조 중에서 아주 독특한 부조가 하나 있다. 원해 항해가 가능한 큼지막한 선박 한 척이 새겨진 부조다. 언뜻 그 수많은 부조 중에서 지나치기 십상이다. 아주 어렵사리 찾아낸 부조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증거를 말해준다. 많은 선원이 돛대에 올라가거나 선상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인도네시아를 연결하던 고고학적 의문점이 풀리는 순간이다. 선박의 설계도에 준하는 이같이 명백한 조각이 확인된 것은 쉽지 않은 행운이다. 자바에서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로 연결되던 뱃길에 사용되던 선박이 보로부두르 부조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계를 연결한 아우트리거

아우트리거는 선체와 평행을 이루는 나뭇조각을 뜻한다. 뱃전 바깥으로 양쪽에 2중으로 긴 막대를 매달아 배가 웬만한 파고에도 전복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게 했다. 이 같은 선박은 7~13세기에 이 지역을 통치한 사일렌드라와 스리위자야 두 왕조의 국제무역선과 전함으로 쓰였다. 아우트리거는 오래도록 인도양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발리나 자바의 해변에 가면 수천년 이어왔을 같은 형식의 아우트리거가 현재까지 장기 지속됨을 흔히 보게 된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마주보는 술라웨시의 마나도에서 부나켄섬을 찾아가니 곳곳에 아우트리거가 보였다.

스리랑카 남쪽의 아라비아해를 조사한 적이 있다. 스리랑카 해안도 예외 없이 아우트리거가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선박이 더러 끼어 있기는 하나, 원주민들은 아우트리거야말로 안전하고 익숙한 배라고 했다. 양쪽에서 지탱하여 배를 안정감 있게 해줄뿐더러, 대항해용 아우트리거는 무거운 짐을 실어 대항해의 물자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도 뱃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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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교류의 비밀이 숨겨진 마다가스카르 섬 지도.


흥미로운 점은 인도양뿐 아니라 태평양의 폴리네시아나 미크로네시아의 선박에서도 아우트리거 선박 양식이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말레이반도에서 동남 방향으로 진출해 폴리네시아에 이른 종족 이동의 결과가 같은 선박 문명의 흔적을 저 태평양으로부터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호놀룰루 9번 부두의 ‘하와이 해양박물관’은 하와이 해양세계와 해양사 및 생활사에 집중하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2중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항해하는 원주민 선조의 영웅적 활약이 그려져 있다. 2중 카누는 2개의 선체를 하나의 함교로 연결하고 돛과 든든한 피신처를 갖춘 ‘우주선’이었다. 돌도끼 같은 석기 도구나 뼈, 조개 등을 이용하여 건조된 카누는 어느 문명권에서 만든 배보다 견고한 위대한 발명품이다. 유럽인이 태평양의 섬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런 거대한 2중 카누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카누는 대항해자에게 생명의 근거지였으며, 역사의 추동력이었다. 크다고는 하지만 대양에서는 일엽편주만도 못한 이 자그마한 카누로 대양을 누볐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목적지도 불분명한 조건에서 그들은 대항해를 완수했다. 보로부두르 유적의 부조에 각인된 선박도 바로 대항해용 아우트리거다. 선박 양식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마다가스카르의 문명 교류가 확인되는 순간이다.

■역사의 숨겨진 동력, 아우트리거

불교 문명이나 이슬람 문명을 통한 문명 교류의 전파 루트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많았던 데 반해, 선박의 양식을 비교 고찰해 문명 교류를 확인하는 일은 의외로 드물었다. 문명의 이동과 교차에서, 특히 바다에서는 이동 수단인 배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정작 그 중요한 배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다. 그동안의 편견을 깨면서 큰 틀에서 아시아인의 대항해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선박 양식으로 본다면 태평양이나 동남아시아 남부인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남동부의 마다가스카르가 동일 문명권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이주 역사에서 보듯이, 말레이반도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선주민들이 각기 다른 해역권의 촉매 역할을 해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간의 해양사 연구는 주로 유럽 중심 사관에 입각해, 유럽의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가 희망봉을 돌아서 어떻게 인도를 ‘발견’했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인도는 결코 ‘발견’된 것이 아니다. 이베리아반도의 대항해가들이 희망봉까지 당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로부터 인도양을 관통하는 데는 수많은 연안의 수로안내인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도양에 능숙한 원주민의 도움 없이는 대항해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역사 서술은 오로지 유럽 중심의 방식을 취한다.

태평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폴리네시아인의 장엄한 태평양 대횡단의 역사에 거대한 아우트리거 카누가 중심 역할을 해냈다. 말레이반도에서 인도네시아 그리고 폴리네시아 섬을 징검다리 삼아서 태평양을 개척한 선주민들의 대항해에는 늘 아우트리거 카누가 동반했다. 그런 점에서 보로부두르 사원의 부조는 역사의 숨겨진 동력을 생동감 넘치게 알려주는 소중한 사례일 것이다.

▷필자 주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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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박물관장, 전 제주대 석좌교수. 해양사, 문화사, 생활사, 민속학, 고고학 등 융·복합적 전방위 연구로 세계를 누벼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식 노마드’이자 비교해양문명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해양문명사가. <등대의 세계사> <독도강치 멸종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환동해 문명사>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등의 저서가 있다.


주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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