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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감춰왔던 내면의 상처, 자신과의 소통으로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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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상 수상 다이앤 리의 ‘로야’ / 성장기 폭력 가정에서 자라 트라우마 / 상처를 준 부모 이해하려 하지만… / 세계문학상 15년만의 재외한인 작품 / 엄마와 딸의 관계·갈등 내밀히 그려 / “독자들 이 책 읽고 마음 따뜻해졌으면”

세계일보

15회 세계문학상을 받기 위해 밴쿠버에서 날아와 서울 중구 성공회성당 앞에 선 캐나다 국적 한인 작가 다이앤 리. 그녀는 “가족이 위로가 안 되고 응원이 안 되고 안식과 평화가 안 될 때 가정은 비무장의 중립지대가 아니라 위협과 공격과 상처만이 가득한 전장(戰場)이 된다”고 썼다. 하상윤 기자


“회복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가 맞아요. 독자가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관점이나 시각이 약간이라도 다른 자리로 옮겨졌으면 좋겠어요. 아주 작은 자극이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큰 균열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큰 사고가 나야 그제야 깨닫고 그러는 거, 이제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15회 세계문학상 수상자 다이앤 리(이봉주·45)가 수상작 ‘로야’(나무옆의자) 출간과 시상식에 맞춰 서울에 와서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났다. 밴쿠버에서 20여년째 살고 있는 캐나다 국적 수상자 다이앤은 수상작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가정에서 자라난 트라우마를 엄마와 딸의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를 축으로 삼아 밴쿠버의 현재 삶을 배경으로 풀어나간다. 자신의 삶을 사실적으로 수용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남편과 딸과 함께 완벽에 가까운 낙원의 삶을 꾸려가는 밴쿠버 중산층 가정의 현재를 배경으로 한국에서 성장할 때 겪어야 했던 상처를 드러낸다. 이 과정은 갑자기 당한 교통사고로 인해 생긴 극심한 통증을 치유하는 맥락에서 하나둘 전개된다. 성장기에 아빠가 가정에서 휘두르는 폭력은 일상이었고 그것은 ‘결코 무뎌질 수 없는 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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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딸은 회고한다. ‘그날 아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빠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본 적 없는 맹수의 것을 닮은 눈으로 아빠는 엄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고, 수돗가에 다다라선 엄마를 내동댕이쳤다. …엄마가 퍽퍽 얻어맞는 둔중한 소리는 예리한 칼이 되어 내 심장을 도려냈다.’ 아빠가 사망한 후 홀로 남은 엄마는 딸에게 피해자의 입장만 내세우며 끊임없이 요구를 한다. ‘엄마는 저 깊은 바닥에 가라앉은 나를 보고도 자신의 약한 손목을 걱정하며 아예 손 내밀 생각을 안 하든가, 언제나처럼 내가 알아서 기어 올라올 거라 생각하든가, 아니면 저렇게 바닥에 가라앉아 있어도 괜찮은가보다 여기며 자기 갈 길을 가든가, 혹은 하필이면 떨어져서 당신을 안 돌본다고 날 비난하든가, 이 중 하나에 속하기도 하고 모두에 속하기도 하는 이였다.’ 딸이 아무리 성의를 바쳐도 엄마는 성에 차지 않고 아이를 출산한 딸에게, 아픈 딸에게 채권자 행세만 할 따름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모녀관계가 소설 속 갈등의 핵심 축이다.

“엄마와 딸의 갈등이 밋밋하다고 더 드라마틱하게 고쳤으면 하는 의견도 있었어요. 저는 20여년간 모국어를 떠나 있어서 문장을 쓸 때 정확한 전달을 위해 영어 문장을 떠올리고 다시 한글로 바꾸는데, 영어권 문화에서 이 서사는 한국어를 쓰는 문화와는 달리 훨씬 자극적입니다. 저는 중간 지점을 찾은 거예요. 어느 쪽 문화에서 보더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치관과 규칙을 상정하면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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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의 서사에 이어 이란계 남성인 남편의 부자 관계를 모티브로 차기작을 이미 쓰고 있다는 다이앤은 문화권을 초월해서 보편적인 가치기준을 적용하는 글쓰기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소설이 연민을 구하기 위해 쓴 작품도 아니라고 부연했다.

“쓰는 이가 너무 아프면 함께 건강해지자고 말을 건네기 힘들어요. 저 자신은 이미 많이 아팠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해지기를 바라면서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대상이 자기 자신과 연결돼 있지 않으면 평가하는 건 쉬워요. 하지만 가족에 이르면 드러내도 아프고 숨겨도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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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한국소설들은 상처의 근원을 파고드는 익숙한 서사 패턴보다는 흥미롭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이번 수상작은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가까운 소재를 선택한 셈이다. 이를 두고 한 심사위원(김별아)은 “나의 상처는 무엇이고 그토록 상처받은 내가 누구인지는 오래된 질문이자 모든 작가의 출발점”이라며 “다만 지금은 잊었거나, 잊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세계문학상 15회 만에 처음으로 재외 한인 작품이 수상작으로 뽑힌 사실도 이채롭다. 이를 두고 최원식(문학평론가) 심사위원장은 “캐나다 국적 다이앤 리의 ‘로야’는 한국문학의 변경(frontier)이 새로이 도래했음을 고지한다”면서 “이 작품은 우리의 유구한 가족주의가 어떤 변경에 도착했음을 예리하게 일깨운다”고 평가했다.

다이앤 리는 ‘완벽하지 못한 부모가 있을 뿐 모든 아이는 완벽하다’고 기술한다. 그녀에게 ‘완벽’이란 ‘가능성’의 다른 표현이다. 아무리 상처로 망가진 가족이라도 그 구성원이 다시 진화된 가족을 만들 수 있는 희망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페르시아어로 꿈과 이상을 의미하는 소설 속 딸 이름 ‘로야’가 제목으로 뽑힌 이유이기도 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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