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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만취여성 사진 올리고 "몸매 어때"···2030 위험한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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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정준영 낳는 '몰카 돌려보기'' 범죄

‘사진을 보냈습니다.’

대학원생 윤모(27)씨는 지난해 군 동기들이 모인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단톡방) 알림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 동기가 술에 취해 기대 있는 여성의 상반신 사진을 올렸다. 잠을 자듯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봐서 동의 하에 찍은 사진으로 보이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다른 이들의 장난 섞인 반응이었다. ‘ㅋㅋ’라는 웃음 표시나 ‘몸매가 좋다’ ‘계 탔다’는 등의 글이 줄줄이 달렸다. 윤씨는 “최근 버닝썬 사태로 정준영 등 연예인들의 몰카 논란이 불거졌는데, 남 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 연희동에 사는 이모(30)씨도 지난 3월 비슷한 일로 언성을 높였다. 겨울 휴가에 간 이씨의 친구가 단톡방에 비키니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이 나온 사진을 올려서다. 이후 이 여성의 외모나 몸매를 품평하는 대화가 이어지자 참다못한 이씨가 문제를 제기했다. 이씨는 “예전 같으면 못 본 척했겠지만 문제가 될 것 같아 ‘몰카라면 범죄다’는 글을 올렸다”며 “친구는 ‘해변 풍경을 찍다가 우연히 찍힌 것’이라고 해명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있다’ 혹은 ‘심한 사진도 아닌데 친구끼리 왜 그러느냐’는 식으로 반응이 갈렸다”고 전했다.

“장난과 범죄의 경계, 안전장치가 없다”
중앙일보

미국 연방수사국(FBI)는 장난과 범죄의 경계를 넘나들며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각종 성 관련 범죄를 섹스링 범죄로 규정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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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수 정준영(30) 등의 몰카 공유 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하지만 일부 젊은 층들 사이에선 ‘섹스링(sex ring)’ 범죄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섹스링이란 집단(ring)적으로 성희롱, 촬영물 공유 등을 하며 놀이를 하듯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성폭행, 성추행과 달리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장난과 범죄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접적으로 성 관련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는 주로 젊은 층 사이에서 스마트폰 등 스마트 기기를 매개로 벌어지는 각종 성적인 범죄를 섹스링으로 규정한다.

일부 젊은 층들 사이에서 섹스링이 ‘놀이’처럼 번지는 건 이들이 각종 스마트폰 기기와 실시간 소통에 익숙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과거엔 테이블에 모여 음담패설을 하는 수준에서 일종의 섹스링이 이뤄졌다면, 최근에는 스마트폰 버튼만 누르면 영상과 사진이 전송되고 반응도 즉각 나오는 환경이 갖춰졌다는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팀장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할 새도 없이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섹스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라며 “장난 수준을 넘어 형사처벌 혹은 민사소송 대상의 범죄로 넘어가더라도 단톡방 등 내부에선 이를 제어할 안전장치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단톡방 성희롱부터, 길거리 몸매 품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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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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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버닝썬 사태로 여론의 도마에 오른 섹스링은 수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고 이뤄지고 있다. 대학가에서 잇달아 터진 ‘단톡방 성희롱’도 섹스링의 일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지난 3월 K교대 체육교육학과 15학번 단톡방에서는 남학생들이 특정 여학생과의 성관계 등을 거론하며 성적으로 모욕하는 대화를 나눠 논란이 됐다. S교대에서도 재학생과 졸업생 대면식에서 여학생의 정보가 담긴 책자를 공유한 뒤 외모와 가슴 등의 등급을 매겼다는 폭로가 나와 청와대 청원까지 올랐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에서는 일부 회원들이 여성의 특정 신체를 부각해 찍은 사진을 올리고, 회원들이 댓글로 평가하는 이른바 ‘여친 인증’ 사건이 터져 13명이 경찰에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

젊은 층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개인방송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헌팅 방송’도 수위에 따라 섹스링에 해당할 수 있다. BJ들이 이태원, 홍대 등에서 길을 가는 이성에게 말을 걸면 시청자들이 댓글창에 외모를 평가하는 식인데, 일부 성희롱 댓글들이 달려 논란이 됐다. 인천에 사는 김아람(28)씨는 “촬영물 등을 공유하거나 이성을 희롱하면서도 잘못된 일이라는 죄책감이 없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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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준영이 지난 3월 21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성관계 몰카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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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섹스링이 일상을 파고 들면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불법촬영물 유포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도 처음엔 장난 섞인 섹스링에서부터 출발했을 것”이라며 “단체로 성을 대상화하고 희롱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 범죄에 대한 심리적 장벽도 자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배규한 백석대 석좌교수는 “사이버 공간을 단순히 사적인 공간이라고 잘못 인식해 범죄가 발생한다”며 “타인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가운데 일종의 연대 의식이 생겨 죄책감이 덜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승재현 팀장은 “저학년 때부터 섹스링이 단순히 또래집단 혹은 친구와의 장난이 아닌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경찰 음지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장난’처럼 여겨졌던 섹스링 범죄에 대해 엄단하겠다는 방침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주로 인터넷, SNS 공간에서 마치 유희처럼 이뤄지는 성 관련 범죄로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가 늘고 있다”며 “장난이라는 해명과 관계없이 범죄가 성립되면 관련법에 따라 처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손국희ㆍ이태윤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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