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커지는 의결권 자문사들의 입김
의결권 자문사란 기관투자자들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주주총회 안건을 분석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회사를 뜻한다. 기관투자자들은 기업 수백곳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별 주총 안건을 자체적으로 분석하기엔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효율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기관투자자들은 자문사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이들이 내놓은 권고에 따라 주주권을 상당 부분 행사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 중인 자문사는 총 6곳이다. 국내 업체 중 가장 대표적인 자문사로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꼽힌다. 2002년 설립된 이 단체는 상근 인력은 43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미국 자문사인 ISS (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는 글로벌 1위 자문사로, 국내의 외국인 투자자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도입한 기관투자자들이 115곳으로 증가하면서 자문사들 역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총에서 조양호 회장이 사내이사 연임에 실패한 것은 자문사들이 잇따라 반대 의견을 낸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이날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ISS 등 총 4곳의 자문사가 회원사들에 반대 의견이 담긴 권고안을 제시했고, 이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중립 의견을 지녔던 주주들까지 반대로 돌아서게 만들었단 것이다. 비적정 감사보고서 파문으로 28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물러난 것도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박 회장은) 그룹 차원의 의사결정을 중요하게 판단해 개별회사 간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적절하지 못한 의사결정을 할 위험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KT&G의 사장 연임안, 맥쿼리 인프라의 운용사 교체안,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 등에서도 자문사들의 판단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자문사 관리 규율하는 법령은 미비
문제는 자문사들을 관리·규율할 법령이 미비해 이들의 자문 능력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은 금융 당국이 자문사들을 직접 관리·감독하고 있지만, 국내 자문사는 컨설팅업이나 여론조사업으로만 등록되어 있어 별다른 관리와 감독을 받지 않는다. 각종 정보를 모두 공개하도록 한 미국과 달리, 한국의 자문사들은 재무제표 외에 별다른 공시의무도 없다. 회원사를 몇 군데 보유하고 있는지, 직원은 어떻게 구성되는지, 의사 결정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핵심 정보는 모두 공개되지 않는다. 기관투자자로서는 어떤 자문사를 무슨 기준으로 선택할지 판단할 근거 자료가 없는 셈이다.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한국거래소·한국예탁결제원·금융투자협회 등의 공동 출자로 설립됐다. 반면,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참여연대 출신들이 주축이 돼 2001년 설립한 기관으로,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 밖에 대신지배구조연구소는 대신증권이 99%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대신경제연구소 산하 기관이며, 서스틴베스트는 메리츠종금증권·SK증권·현대증권 등에서 기업 분석을 담당했던 류영재 대표가 설립한 회사다. 재계 관계자는 "반(反)재벌 정서가 강한 자문사의 경우엔 기업 이익 극대화 외에 정치적 고려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 안에 자문사를 관리·규율하는 새로운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자문사 규율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에 착수했다. 자문사가 영업하려면 당국에 신고나 등록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자문사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들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관리 규율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준우 기자(rainrac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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