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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이슈 책에서 세상의 지혜를

[허진석의 책과 저자] 신동엽 평전, <좋은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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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1980년대의 문학 청년이 글쓰기를 배울 때 신동엽의 시집은 교과서 가운데 하나였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문청이라면 <금강>이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같은 시집을 닳도록 읽었다. 〈껍데기는 가라〉와 같은 시는 읽는 이의 내면에 시인의 윤곽을 선명하게 새긴다. 작설(雀舌)처럼 선연한 감각과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청춘들에게 신동엽의 언어는 탄환처럼 가서 박히지 않았으리.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백과사전이나 문학사전, 문학인명사전을 찾아보면 대개 이 시를 신동엽의 대표시 또는 대표적인 시로 꼽는다. 1967년 1월 <52인 시집>에 수록되어 ‘반제국주의와 분단 극복의 단호한 의지가 응집되어 있는 참여시의 절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은 ‘참여시에 있어서 사상이 죽음을 통해 생명을 획득하는 기술이 여기 있다’고 하였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껍데기는 가라〉를 “현실적 과제를 정면으로 다룬 1960년대 참여문학의 대표작이며, 이후 군사 독재에 항거했던 민중 민족 문학의 이정표 역할을 한 작품”으로 본다. 그가 보기에 “비교적 단순한 소재와 이미지를 지닌 단어를 반복하여 내용을 강조하는 시인의 특성을 반영한 듯, 전체 17행 가운데 ‘껍데기는 가라’라는 구절이 6행을 차지할 정도로 이 시의 주제 의식은 명확하고 단호하다.”


연구자들은 중립의 초례청에서 아사달과 아사녀가 혼례식을 치르는 것은 분단 극복, 곧 통일이라는 시인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한다고 본다. 시인은 동학농민운동과 4·19혁명이 지닌 반봉건 내지 반제국주의를 분단 극복의 역사적 과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례청은 판문점 같은 곳인가. 시인 신동엽의 정신이 가 닿은 곳에 역사의 매듭은 변함없는 세월을 옭죄고 있다.


나는 대학생일 때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곁에 있던 샘터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출판부장으로 일하던 시인 김형영에게서 신동엽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김형영의 기억 속에 남은 신동엽은 병색이 완연한 만년의 모습이었다. 명동의 단골 술집에 핼쑥한 얼굴로 앉아 눈빛만을 빛내는 젊은 시인. 불과 마흔 살에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요절이다. 뛰어난 시인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마음이 아팠다.


시인은 기억 속에 단편으로 남아 있다. 대부분은 작품으로, 몇몇 조각은 주워들은 이야기로. 그래서 신동엽 시인의 전모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 신동엽은 사실 사회 비판적인 성향이 짙은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런 아쉬움을 소명출판에서 새로 낸 평전으로 어지간히 달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좋은 언어로>는 신동엽 시인의 어린 시절부터 그를 추모하고 있는 모습까지를 다루었다.


2019년 4월, 50주기를 맞이하여 나온 이 평전에서 어릴 적의 통지표, 입학허가서부터 결혼식 사진, 가족 사진, 직장에서의 모습, 시인으로서의 생활과 다른 문인들과 함께 있는 모습 등 다양한 부분의 신동엽을 육필 원고, 사진, 편지 등의 시각 자료로 살펴 볼 수 있다. 이런 자료들은 인간 신동엽이 어떤 아들, 남편, 아버지, 친구였는지 알 수 있게 도와준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러브레터를 쓴 로맨틱한 남편, 딸과 아들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했던 아버지가 보인다.


출판사는 이 책을 설명하기를 “50주기를 맞이하여, 2005년 발간된 <시인 신동엽>의 틀린 부분을 바로 잡고, 이후 내용을 보강하여 새롭게 출간한 것이다. 신동엽 시인 부인 인병선 여사가 고증한 실증적인 평전이며, 그의 육필 원고, 사진, 편지 등 여러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 신동엽을 상상하고, 생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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