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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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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우리가 몰랐던 ‘위안부’의 끈질긴 역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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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5일부터 3월20일까지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이란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2014년 여름 미미하게 시작했던 일이 큰 성과를 내며 창대하게 끝난 셈이다. 공문서·사진·영상 등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수집, 연구자를 위한 학술 자료집과 일반 시민을 위한 대중서 발간, 그리고 전시회와 디지털 아카이브(기록 보관) 구축 준비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위안부’ 문제를 지난하지만 고통스럽게 대면하고 응답하는 데 제법 긴 시간과 온 열의·열정을 쏟았다. 자료에 말 걸고, 자료가 말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피해 여성들이 남긴 증언과 교차하며 전쟁에 성적으로 동원된 여성들의 여러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했다. 그 이야기들은 결코 ‘강제연행’의 증거나 민족 피해의 여성적 재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난 특별 도슨트(전문 안내인)로 몇 차례 관람객에게 전시를 설명하면서 일본 오키나와로 끌려가고 버려졌던 배봉기의 삶과 이야기를 몇 번이나 곱씹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 “일상이 전쟁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던 일상이 이미 전쟁 같았다”는 말은 전쟁의 일상과 일상의 전쟁에 동원돼 살아야 했던 여성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지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나도 전쟁처럼 살아야 했던

잘 알려졌듯, 배봉기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배봉기의 선택이었지만, 가난과 ‘정조’ 등의 이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계급적·가부장제적 구조의 구속이 내면화된 결과로 나온 선택이었다. 사실상 강제로 남은 거로 봐야 한다. 배봉기는 민간인을 억류했던 수용소를 빠져나와 절망적으로 오키나와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전전하며 술집에서 접대하고 식모로 일하는 등 그의 삶은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평생 겪으며 트라우마적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전쟁 때 총알 한 발로 죽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내뱉은 말은 전쟁이 끝났어도 전쟁 같은 삶의 고통과 고단함을 웅변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말의 다층적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한국으로 ‘귀환’한 ‘위안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고향에, 집에 돌아가 이제는 전쟁 없는 일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오키나와에 잔류한 배봉기의 삶과 완전히 달랐을까?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할(분단)점령과 군정, 정부 수립 전후의 내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쟁과 일상에서 ‘귀환’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겪었던 일을 가족, 친지, 공동체에게 함구해야 했다. ‘정조’를 지키지 못한 죄와 수치심을 내면화해 자기를 부정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배봉기처럼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키나와 군사기지는 한국전쟁의 전장과 연결돼 있었다. 오키나와에 남은 배봉기와 한국으로 귀환한 ‘위안부’의 전쟁 일상도 연결돼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국가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역할은, 그게 일제든 한국이든, 변함없이 위안·위무·위문이었다. 각종 오락과 유흥은 물론 성의 제공을 포함했다. 여성사의 시각과 방법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한 이임하(‘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2007)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남성 국민을 ‘병사형 주체’로, 여성 국민을 ‘위안형 주체’로 젠더화했다. 위안·위무·위문은 위안하는 주체의 계급에 따라 민간 외교 활동으로 치장된 오락·유흥·성의 제공인지, 유엔군 위안소에서 은혜로운 미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유흥과 성의 제공인지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김활란·모윤숙·임영신·박마리아 같은 여성 지도자들은 여학생이나 대한여자청년단, 대한부인회의 젊은 여성들을 동원해 병사들을 위무·위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주로 ‘파티대행업’에 나서 유엔군 장교와 외교관 등 영향력 있는 남성들을 위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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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하우스의 용도

1951년 계속되는 필승각(빅토리아하우스) 파티에는 이화여대 학생·졸업생들이 동원됐다. 노래와 무용이 곁들여지거나 여러 유형의 시중이 더해졌다. 낙랑클럽은 더 갔다. “낙랑 걸”들은 유엔군 고위급과 외교관들을 상대로 ‘국부’(國父) 이승만을 위한 로비와 정보 수집을 했고, “밤에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접대”했다. 이임하는 “성을 매개로 하여 열리는 파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시중을 드는 여학생들, 노래와 무용 등은 전형적인 이승만식 외교”였다고 평한다.

사진❶은 이경모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문관을 그만두고 한국사진신문사 사진부장으로 활동할 때 찍은 것이다. 정통 르포르타주 형식이 두드러지는 이경모 사진답게 사진 속 구도와 피사체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속삭이듯 말을 걸고 있다. 이기붕 국방장관 취임 축하를 위해 박마리아가 초대한 주한 미국대사와 미8군 수뇌부, 그리고 문 밖에서 노래하는 여학생들을 포착하고 있다. 적산가옥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국방장관 관사 안방에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흰저고리 검정치마 차림으로 앉아 있고, 그 옆에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와 콜트 미8군 부사령관이 앉아 있다. 화각이 넓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사진 왼쪽에는 이기붕 장관(시계를 찬 손목)과 양옆으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 김활란이 앉아 있었다. 군과 외교의 최고위층 인사들이다. 안방에 신발을 신고, 게다가 발(군화)을 쭉 뻗은 자세를 보고 종속적인 한-미 관계를 절묘하게 포착했다는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난 적산가옥이 자아내는 (탈)식민주의적 장소성과 “여흥을 돋우기 위해” 문 밖에 서서 “팝송”을 부르는 “이화여대 학생”들의 모습에 더 눈이 간다. 이를 두고 한-미 관계를 촉진한 민간 외교로 보고 넘어갈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김활란·모윤숙·박마리아 등 여성 지도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또는 스스로 청원해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에 당시에도 사회적 시선과 여론이 곱지 않았다는 거다.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했든 안 했든 말이다.

그래도 이건 약과였다. 이승만 정부는 ‘공창제도 등 폐지령’(과도정부 법률 제7호, 1947년 11월14일 공포, 1948년 2월14일 시행)에 반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아예 업자를 두고 유엔군 전용 위안소를 설치·운영하는 데 개입했다. 단지 유엔군의 노고에 감사 보답하기 위해서였겠는가? 박정미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의도를 가지고 불법이지만 “묵인 관리”하는 방식으로 개입했다(‘한국전쟁기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 위안소와 위안부를 중심으로’, 2011). 정부가 내세운 건 전선 이동이 미미하고 주둔군 병사들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군이 저지르는 성범죄(강간 등)로부터 “일반 여성의 정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로 삼기 위해 유엔군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거다. 미군이 요청해서 한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논의도 있다. 전쟁으로 생계 수단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여성이 성을 팔았고, 돈과 물자가 있는 미군 주둔지 주변으로 여성들이 몰렸는데, 이에 현실적으로 성병 점염을 통제하고 “제5열(내부의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미군이 한국 정부에 유엔군 전용 위안소 설치와 관리를 요청했다는 거다.

공창제 폐지해놓고 위안소 설치

미군 등 유엔군 주둔 지역 주변 거리에 위안소가 들어섰다. 군부대 막사, 야산, 들판 가리지 않고 이동형 위안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9~10월 등장해 1951년 6월 전후 전선이 38선 부근에 고착화하면서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1953년이 되면 ‘필요악’이라 주장될 정도로 상설화됐고, 전국적으로 분포하면서 특정 지역의 격리 설치도 논의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건 이승만 정부가 불법임을 의식하고도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워 위안소를 설치하고 관리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행정명령을 지시했다는 거다. 하위 명령이 상위 법률을 위반하는 성매매에 대한 “묵인 관리”였다. 박정미가 처음 밝힌 바에 따르면, 첫 사례는 1951년 10월10일 보건부가 결재한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추가 지시에 관한 건’(보건부 방역국 1726호)이다. 이 지시에서 ‘위안부’는 “위안소에서 외군을 상대로 위안접객을 업으로 하는 부녀자”로 정의됐다.

이 지시는 위안소 신설과 영업 허가, 위안부 건강 진단, 위안소와 위안부의 격리 등을 규정한다. 기타 준수 사항에 “이 영업은 6·25 동란을 계기로 전쟁 수행에 수반된 특수영업태이며 의법적 공무사업이 안이(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여 취급할 것”이라고 명기한 것으로 보아, 정부 스스로도 법에 반하는 지시를 내렸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표지에 이 지시의 “영문자료(를) CACK(미8군 하부 조직인 UNCACK 부대 지칭)에게 제시할 것”이라고 쓰인 것으로 볼 때, 그리고 지시 사항 중 “허가 신설은 주둔군 당국의 요청에 의할 것”과 “건강진단을 취체(단속)하기 위하야 외군헌병대에도 연락”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미군이 군 전용 위안소를 승인하고 성병 관리 차원에서 한국인 여성의 몸을 위생·경찰의 시각과 방법으로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전후에 기지촌 성매매 집결지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고 성병에 걸린 미군 병사가 “컨택”(성병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찍는 것을 의미)하면 “낙검자 수용소”로 끌려가 성병이 치료돼 나오거나 죽어서 나왔다는, 이를 두고 “토벌당한다”고 표현했던 미군 ‘위안부’의 말은 그 자체로 국가폭력, 국가범죄가 여성의 몸에 자행됐음을 드러내준다(‘[토요판] 인신매매 당한 뒤 매일 밤 울면서 미군을 받았다’, <한겨레> 2014년 7월5일치).

사진❸은 사진병 크리잭(Kryzak)이 찍은 것으로, 한국인 의사가 성병 치료를 위해 미 제3보병사단에서 운영하는 민사구호소로 데리고 온 성매매 여성들을 진료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구호소 막사 안 화사해 보이는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검진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표정은 어둡다. 이 사진은 당시 “대외비”로 분류돼 이용이 제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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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경력자들의 발상

1952년 유엔 당국과 UNCACK(“주한유엔민사처”)의 지시로 한국 정부는 전국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해 건강진단서를 발급하고 성병 예방과 치료에 나섰다. 2월20일 한 보도에 따르면, 보건장관은 전국에 약 40개의 성병진료소를 설치했고, 더 증설 중이라고 했다(<경향신문> 1952년 2월23일치). 당시 보건 통계에 따르면, 1952년부터 성병 검진 연인원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건강을 회복한 “연인원”이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성병 예방과 치료 대책이 성과를 거두었다는 말이다. 이승만 정부가 성병 관리를 거부하는 대상을 강력히 단속하고 처벌한 효과도 작용했을까? ‘위안부’들은 “밀정”이나 “제5열 분자”로 의심받고 단속되기도 했다. 인도주의적 의료구호로 보이는 성병 예방 조치에는 사실 성병을 유발하고 옮기는 존재, 즉 위생적 차원의 ‘불순분자’가 있고, 이들을 위생 처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돼 있었다. 성병으로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신체를 보호하는 보건위생 조치가 제5열 침투를 통한 공산주의 전염을 차단하고 유엔군과 자유세계를 수호한다는 담론과 연결돼 있었다.

이 정도 얘기했으니 한국군이 군 위안소를 설치, 운영했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생뚱맞다고 치부하지 말길 바란다. 김귀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육군본부가 1956년 출간한 <6·25사변 후방전사>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했고, 참전 장군과 병사 등의 회고와 증언을 종합해 한국군 위안부와 특수위안대의 존재를 주장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병사의 사기를 진작하고 전시 집단강간을 방지하며, 성병을 예방하고 군사기밀 누설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과거 일본군 경력이 있는 일부 간부들의 발상으로 특수위안대를 직영으로 설치, 운영했다. 유엔군 위안소가 업자를 내세운 군 전용 위안소로 한국 정부와 미군은 설치 요청, 허가·취소, 성병 관리와 처벌의 방식으로 개입했다면, 한국군 특수위안소는 군이 직접 설치해 운영하고 ‘5종 보급품’으로 ‘위안부’를 ‘조달’(동원)한 것이다. 부대마다 ‘조달’ 방식은 달랐지만, 종삼(서울 종로3가) 등 사창가에서 여성들을 동원하거나 일부는 ‘빨갱이’ 여성 등의 강간과 납치를 통해 강제 동원했다. 그 수가, 빈약한 자료와 회고를 종합하면 최소 79명에서 최대 240명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위안소를 이용한 병사가 1952년에만 연인원 20만 명이 넘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누가 포주인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소생했다. 그 제도를 떠올린 “발상”, 그 발상을 어떤 제지도 없이 실행한 한국군 수뇌부, 법 위반임을 의식하면서도 “묵인 관리”하겠다고 조처를 하고 나선 이승만 정부,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오키나와와 한국 점령에 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위안부’ 제도의 관리 방식에 동화된 미군, 그들은 전쟁에 동원된 여성들에게 ‘포주’의 위치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전쟁의 일상, 일상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살고자 한 인생 전체가 국가가 관여한 성폭력으로 얼룩진 ‘위안부’ 여성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하고 기록 기억하며, 응답해야 할까?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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