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김석윤 감독, '청담동 살아요'로 김혜자와 인연
속편 원하는 김혜자에 헌정드라마 '눈이 부시게' 제작
"자신을 하얗게 불태운 김혜자 배우의 열연에 감사"
"돌맞을 각오로 치매 반전 만들어, 호평에 감사할 뿐"
"늙음은 누구에게나 공평, 세대갈등 없는 사회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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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 현장스틸. 김석윤 감독(왼쪽)이 배우 김혜자에게 연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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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78)의 열연이 눈부셨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25살 혜자(한지민)가 우연한 계기로 갑자기 늙어 70대 노인(김혜자)의 몸으로 살아가며 노인의 삶을 체험하는 9회까지의 전개는 시청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안겨주기 위한 '트릭'이었다.
10회 후반 지금까지의 모든 에피소드가 치매환자 혜자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환각이었다는 충격적 반전을 선사한 드라마는 후반부(11·12회)에 환각과 포개지는 혜자의 아름답고도 가슴아픈 개인사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때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한 인생이었지만,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찬란한 메시지를 시청자들의 가슴에 새겨넣었다.
드라마가 웰메이드란 평가를 받는 건, 김혜자의 열연 때문만은 아니다. 타임슬립 서사에 코미디와 소소한 감동을 섞고, 결국엔 '대단하진 않지만 살 가치가 충분했던' 개인사를 통해 삶과 노화의 의미를 길어올린, 수려한 연출력도 큰 몫을 했다. JTBC 개국드라마 '청담동 살아요'(2011~2012)로 김혜자와 인연을 맺은 김석윤(55) 감독은 이번 작품이 '청담동 살아요'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주인공 혜자가 50년전 자신과 소통하는 마지막회 내용이 '눈이 부시게'의 씨앗이 됐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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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 현장스틸. 배우 김혜자와 함께 한 김석윤 감독(왼쪽)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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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 현장스틸. 김석윤 감독(가운데)이 배우 김혜자(왼쪽)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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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왜 김혜자였나.
A :
"선생님께서 '청담동 살아요' 속편이 나오면 출연하고 싶다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재작년 12월쯤 그게 선생님의 진심이란 걸 알아채고 김혜자 헌정드라마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곧 바로 그간 같이 협업해온 이남규·김수진 작가와 회의에 들어갔다. 헌정드라마인만큼 진실된 스토리를 만들자고 했다."
Q : 시청자들이 불편할 수도 있는 '노화'를 소재로 택한 이유는.
A : "우리 팀이 노인에 대한 얘기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기획하던 치매 관련 시나리오도 있었고."
Q : 김혜자 배우가 그런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흔쾌히 동의했나.
A : "'이건 선생님의 이야기인데 노인의 민낯도 보여주고, 조금 더 할머니스럽게 나와야해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라고 여러번 말씀드렸다. 사실 선생님이 tvN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이후 치매관련 작품을 안한다고 했었다. 게다가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은 노인을 연기해야 하는데 왜 부담이 없었겠나. 하지만 '멋진 작품'이란 우리의 말을 믿고 출연해주셨다. 치매를 부정적이지 않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무척 뿌듯해하신다."
Q : 25세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 부담이 컸을 것 같다.
A :
"맞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방송국에 열번 이상 오셔서 같이 연습했다. 그 결과 대사 스피드도 빨라졌고, 나중엔 친구들(송상은, 김가은)과 함께 셋이 등장하는 신의 대사를 연습하기도 했다. 인터넷을 잘 하셔서 '어그로' 같은 젊은이들의 말이나 1인방송도 잘 이해하셨다. 선생님이 감정에 집중할 때 목소리가 굵어지는 버릇이 있어, 현장에서 '목소리 얇게 가볼게요'라고 가끔 주문한 것 외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자연스러운 혼신의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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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실제 나이보다 더 많은 노인을 연기한 배우 김혜자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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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70대 노인 김혜자의 얼굴에 한지민이 겹쳐보이는 연기는 정말 놀라웠다.
A :
"3회부터 한지민 없이 혼자서 준하(남주혁)와 합을 맞춰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가지신 건 사실이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제부턴 선생님이 끌고가야 하니까, 선생님 운에 맡겨야죠'라고 했다. 남주혁이 놀라운 연기력으로 드라마 중반부를 든든하게 버텨줬기에 선생님도 더욱 힘을 내실 수 있었다. 선생님이 이번 작품에 상당히 감정이입하셨다. 먼저 떠나보낸 남편 등 자기 삶과 겹쳐보였던 부분도 있었고, 대본 작업부터 소통하며 만든 작품이라 더 동일시하신 것 같다. 자신을 하얗게 붙태우셨다."
Q : 치매 환자의 내면으로 들어간 최초의 작품이란 평가다.
A :
"김혜자 배우와 함께 노인과 세월에 대한 드라마를 하기로 했으면, 과감하게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청률 보다는 완성도에 방점을 찍고 싶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에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섬망과 과거 기억, 바람이 섞였다는 전제 하에 모든 스토리가 다 가능했다."
Q : 엄청난 반전을 감춰놓았기에 부담도 컸을 듯 하다.
A :
"코미디와 서정적 얘기를 오가는 흥미로운 전개로 10회까지 시청자들을 붙들어뒀다가 반전이 밝혀진 후반부에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반전에 대한 부담도 컸다. 혜자가 치매 환자라는 게 밝혀지는 10회 엔딩이 나올 때, 시청자들로부터 '무책임하다'는 비난과 함께 돌 맞을 줄 알았다. 반전에 대해 회의에서도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11·12회에서 우리가 하고자 했던 얘기를 잘 풀어가면 된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물론 반전을 알고 다시 봐도 허망하지 않도록 아귀가 맞아야 한다는 원칙은 있었다. 홍보관 노인들이 감금된 준하(남주혁)를 구출해내는 '노벤져스' 활약 때 시청자들이 '이거 이상한데? 꿈이나 치매 아냐?'란 의심을 갖길 원했고, 의도한대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정말 다행이다."
Q : 11·12회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A :
"노인과 젊은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노인들을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던 것처럼 대하는 잘못된 시선과 혐오가 없었으면 좋겠다. 세상엔 늙은 사람과 아직 안늙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늙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면 세대간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영화 '은교'에도 '네 젊음이 훈장이 아니듯, 내 늙음도 형벌이 아니다'라는 대사가 있지 않나."
Q : 노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A :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KBS2, 2004~2005)를 할 때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이번 작품으로 노화와 시간에 대한 생각이 더 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노인복지원에 다니는 80대 노모의 인지기능이 점점 떨어지는 걸 보며 치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문제 아닌가. 치매가 전제가 되면 판타지를 통해 노인 얘기를 더 많이 할 수 있다."
Q : 쓸쓸한 노년의 삶과 출구없는 젊은 세대의 현실을 포개놓은 의도는 무엇인가.
A :
"'청담동 살아요' '송곳' 등의 작품을 통해 좌절과 꿈 사이를 오가는 이들, 성공하지 못한 다수의 얘기를 해왔다. 애초 그런 캐릭터들에 집중해왔기에 이번 작품에도 자연스레 '흙수저'들이 들어간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번 드라마로 88만원 세대가 위안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
Q : '에러도 아름다울 수 있어. 오로라처럼'이란 대사가 젊은 세대에 큰 위안이 됐다.
A :
"원래는 혜자와 준하가 함께 바라보는 이상향으로서 오로라를 떠올렸는데, 김수진 작가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대사로 바뀌었다. 스스로 에러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 모든 준하를 보듬는 치유의 말이 됐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라는 감동적인 혜자의 엔딩 내레이션도 김 작가가 썼다. 이남규 작가의 코미디, 김 작가의 감동적인 대사가 합쳐져 드라마가 순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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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혜자가 제사상에 놓여진 남편 준하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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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필화 사건에 연루된 준하가 고문사하는 대목에서 유신에 맞서 싸운 언론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A :
"준하란 이름은 그의 죽음을 어두웠던 시대의 고문사로 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지은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장준하 선생을 떠올리게 할 순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바꾸고 싶진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유품인 시계 또한 장준하 사건과 겹쳐지는데, 타임슬립 매개체로서 시계를 선택했을 뿐이다. 우연이 너무 겹치다 보니, 장준하 선생이 신묘하게 작품 속으로 들어오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Q : 김혜자의 연기를 빛내준 수많은 조연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A :
"다들 선생님에 대한 헌정이란 의미에서 기꺼이 참여해줬지만, 각자 의미있는 결과를 남겼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한지민은 로맨틱코미디에 대한 갈증을 짧게나마 해소했고, 이정은의 엄마 연기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손호준은 분량 상관없이 캐릭터 자체에 행복해했다. 안내상은 12회 눈 쓰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모자가 화해하는 장면 하나만 보고 작품에 참여해줬다. 안내상이 아니면 안되는 눈빛이었다. 수퍼 카메오 윤복희와 손숙 선생님은 대본 작업 전부터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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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눈을 쓸던 혜자가 눈물 흘리는 아들(안내상)의 볼을 쓰다듬고 있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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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치매 환자 혜자(왼쪽)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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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김혜자 배우가 촬영현장에서 눈물을 가장 많이 쏟았던 장면은.
A :
"치매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10회 엔딩장면이다. 바닷가 노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젊은 모습인 한지민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눈물이 진하다 못해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촬영·편집하며 울었던 순간이 정말 많다. 개구진 면모부터 나이듦에 대한 안타까움과 체념까지 배우 김혜자의 모든 걸 끄집어내 사용한 작품이다. 말도 안되는 코미디부터 깊이있는 울림까지 김혜자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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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한 장면. 1970년대 행복했던 혜자 가족의 한 때 [사진 JT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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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떤 장면에서 눈물이 가장 많이 났나.
A :
"마지막회 혜자가 눈 쓸며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에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다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울었던 대목은 혜자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퇴근하는 남편 준하를 마중하던 때를 꼽는 회상신이다. 노을을 더 예쁘게 만들고 싶었다.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내 예전 기억과 겹쳐지면서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이 때 김 감독의 눈시울이 다시 촉촉해졌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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