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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단독] 김정은·트럼프 ‘영변 핵시설’ 정의부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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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 왜

북, 우라늄·플루토늄 생산시설 국한

미국은 핵 관련 390개 건물 포함

미 재무부·CIA까지 전 부서 출동

볼턴 등장시켜 완전 비핵화 압박

싱가포르 때와 달리 결렬 선택

중앙일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회담장인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확대 정상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앨리슨 후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한반도 보좌관, 매슈 포틴저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존 볼턴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트럼프 대통령, 이연향 미 국무부 통역국장, 믹 멀베이니 미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 이용호 북한 외무상, 신혜영 북한 통역관, 김 위원장,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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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결렬이라는 결과를 안고 지난 2일 베트남 동당역을 떠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환송객들에게 오른손을 들어 감사를 표했고 양손을 위로 흔들기도 했지만 피곤함이 일순 표정에 드러나곤 했다. 외교 소식통은 3일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예정됐던 회담 오찬 취소에 이어 합의문 도출 실패까지 이어지는 상황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정부 안팎 5명의 소식통의 전언을 종합하면 이번 회담 결렬은 결국 미국이 주도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 소식통은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며 “누가 판을 깼는지가 핵심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김 위원장이 오찬을 취소당한 셈”이라고 전했다.

균열의 시작…'영변'의 정의가 달랐다


결렬을 부른 핵심 쟁점은 ‘영변 핵시설 폐기’의 범위였다. 정상회담을 앞둔 실무협상 당사자였던 미국 국무부와 북한 외무성은 지난달 28일 회담 오찬 취소 후 각각 “북한이 우리에 제안한 것은 일부 폐쇄였다”(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영변 핵시설의 전부 폐기를 제안했다”(이용호 외무상)며 공개 충돌했다. 1일엔 미국 국무부 당국자가 “북한이 말장난하고 있다. 북한은 영변 단지 일부 폐쇄를 제안하며 모든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다”고 반박했고,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미국에 영변 핵시설 일부가 아니라 ‘다 내놓겠다’고 했다”고 거듭 주장했다.

회담 과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이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영변 핵시설’의 정의를 놓고 달랐다”고 설명했다. 북·미 엇박자의 근원이었다. 그는 “북한이 미국에 제안했다는 ‘영변 핵시설’은 주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시설”이라며 “이는 영변 핵시설 단지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영변엔 플루토늄 생산에 필요한 흑연감속로, 핵연료봉 재처리 시설 및 제조공장, 폐기물 저장고와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시설 및 핵연료 보관, 원자로 가동 점검 시설, 관련 연구 시설 등 핵물질 생산·보관·처리와 관련된 390개 이상의 건물이 밀집해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용호 외무상, 최선희 부상이 주장한 ‘영변 핵시설 전부 폐기’는 따라서 “영변 핵물질 제조 시설 전부 폐기” 취지였다. 소식통은 “미국은 이번에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원칙으로 임했다”며 “미국이 보기엔 북한의 카드는 영변 핵시설의 일부 폐쇄였고, 이것만으론 북한이 원하는 대북제재 완화를 절대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더는 언급을 피했지만 미국 측은 단순히 핵물질 제조·보관 시설의 폐쇄가 아니라 영변과 관련이 있는 핵 리스트 신고 등의 전면적 조치를 원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고 이번 북한의 영변 제안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영변은 북한 핵 개발의 심장부로, 북한이 제안한 플루토늄 재처리 및 고농축우라늄(HEU) 생산 시설은 핵심 중의 핵심 시설이다. 이용호는 이 시설에 대한 국제사찰도 미국에 제안했다고 지난 1일 새벽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영변 카드를 받지 않았다. 회담 전에 이미 대북 협상의 허들을 높였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가 노출된 게 지난달 28일 오전 확대 정상회담이었다.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확대 정상회담에 자리하면서다. 이때 미 측에선 볼턴과 함께 폼페이오 국무장관,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이 배석했다. 북측에선 이용호 외무상과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배석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볼턴은 이 자리에선 정작 발언은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볼턴이 앉은 자체가 ‘전면적 비핵화 없이는 대북제재 해제는 없다’는 미국 측 벼랑 끝 전술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볼턴은 회담 시작 전날에 트럼프 대통령보다 하노이 현지에 먼저 도착해 대화파였던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를 견제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는 2일(현지시간) “볼턴 보좌관부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복수의 트럼프 참모진은 전체적 비핵화 요구를 북한이 들어줄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라고 봤다”며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친서 등을 보이며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고비의 순간…볼턴의 존재감


북한 매체들이 북·미 확대 정상회담 결과를 전하면서 미국 측 참석자 소개를 아예 건너뛴 건 볼턴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 공사는 3일 자신의 블로그에 “북한이 확대회담 참석자들을 보도하지 않는 이유는 김 위원장이 ‘핵 은폐 의혹’을 제기한 트럼프 대통령을 추동한 것이 볼턴이며, 결국 그가 회담을 결렬시킨 장본인이라고 (여겨) 대단히 화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이번 회담에 대북제재 및 북핵과 관련해 전수(全數)에 가까운 부처에서 전문가와 담당자를 총출동시켰다고 한다. 정부 소식통은 “미국은 이번에 실질적 비핵화 진전을 이뤄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며 “백악관·국무부·재무부·CIA는 물론 에너지부와 같은 곳의 실무진이 완벽하게 트럼프 대통령을 지원했다”고 전했다. 이는 회담이 성사되도록 지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압박하고 설득할 수 있도록 미국 행정부의 대북 정보망이 총동원됐다는 의미다. 트럼프 대통령이 28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영변 외 핵시설에 대한 증거를 댔더니 북한이 깜짝 놀라더라”고 말했던 대목도 이 같은 철저한 사전 준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영변 외 핵시설을 놓곤 북한이 평양 인근 강선에서 비밀리에 가동 중인 우라늄 농축 시설을 뜻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2차 정상회담은 결국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열린 6·12 1차 정상회담과 내막에선 닮은꼴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에도 북·미가 정상회담 전날까지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단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 비핵화 조치가 빠진 합의문을 내놓는 것을 선택해 회담 성과를 포장했지만 이번에는 포장 대신 결렬을 택했다는 점에서 외양에선 차이가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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