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이현경 기자 = "내 나라 내 땅에서 만세 시위를 하는 것이 무엇이 죄요? 오히려 죄 없는 사람을 침략하고 강제로 억압하는 당신들이 죄입니다."
서대무형무소에 수감된 18세 소녀 유관순이 재판장에서 한 진술이다.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에 망설임 없이 학교 담장을 뛰쳐나가 독립만세를 외쳤던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휴교령에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직접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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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뿐 아니라 수많은 무명의 지사(志士)들이 독립을 위해 힘써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선열들의 숭고한 뜻이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보급 유물을 다량 보유하고 있는 간송미술관 관계자는 올해 초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대한콜랙숀' 전시회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이 '3·1절'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 '삼점일'로 읽는 사람도 있다더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100년 전 독립을 꿈꾼 선열들의 참뜻을 잊은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할 시점이다.
◆ 민족자결주의 도래…독립선언과 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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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종교계(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돼 독립운동의 불씨가 켜졌다.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고 비밀리에 전국으로 배포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종교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는 민중들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켰다.
애초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펼치려고 했다. 하지만 많은 민중이 몰려 유혈 충돌을 우려해 계획을 바꿔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꿨다. 이날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무렵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모였다. 이들은 강기덕과 김원벽 등 학생의 연락을 받고 집결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오후 2시 한 청년이 팔각정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낭독이 끝나자 학생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하늘로 향해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바로 독립만세 운동의 첫 불씨였다. 학생이 중심이었던 만세운동은 상인과 평범한 시민들로 이어지며 약 두 달간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번졌다.
◆ 해외까지 퍼진 민족운동…비폭력 시위, 대규모 참상
3·1운동은 자주 국권 수호를 위해 국민들이 스스로 일으킨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3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4일 평안남도 강서, 16일 경상남도 합천 등 전국 8도와 만주, 연해주, 일본 그리고 미국 등 이국 땅까지 확산됐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그해 4월까지 두 달동안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집회 횟수는 1542회, 참가 인원은 202만명을 훌쩍 넘었다. 만세운동으로 일본군에 체포된 사람은 4만7000명에 육박했고 불에 탄 민가와 교회는 700여 채에 달했다. 두 달간 독립만세운동으로 사망한 국민은 7509명, 부상자 수는 1만5961명이었다. 이는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때 사망·실종자(2만명)에 버금가는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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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들의 참혹한 죽음은 4월15일 오후 2시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일어난 '제암리 학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으로 30여 명이 총살당했다. 앞서 화성 시민들은 장날을 맞아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은 송산지역(3월28일), 향남지역(3월31일), 장안·우정지역(4월3일)에서 이어졌고 일본군은 예고 없이 들이 닥쳐 주민 46명을 사살, 400여명을 연행해 고문을 가했다.
이에 주민들은 봉하 시위와 일본순사를 처단하는 등 공격적인 시위를 벌였다. 4월15일 일본 특별검거단은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러 왔으니 교회에 모이라"고 한다. 대상은 15세 이상의 남자였다. 교회로 오지 않은 만세운동 주도자들을 일부러 끌어오기까지 했다. 미리 파악한 만세운동 주도자들이 다 모이자 일본군은 교회 문을 폐쇄 하고 이들을 총살했다. 그리고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를 불태우기까지 했다. 제암리 주민이었던 전동례 할머니는 사건이 일어난 지 63년 만인 1982년, 제암리 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할머니는 "그 이튿날까지 여기서 30리 밖까지 재가 날아가고 송장 탄내가 났다"고 기억했다.
◆ 간도·자유시참변, 무참히 짓밟힌 독립지사들
간도참변으로도 불리는 경신참변도 독립군이 아닌 민간인이 대규모로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들은 그 지역에 살던 무고한 한국인들이 목숨을 앗아갔다. 1920년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무려 7개월간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어졌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1만여명이 죽고 민가 2500여채, 학교 30여채가 불탔다.
자유시참변(1921년 6월28일)도 역사적으로 묻힐 수 없는 아픔이다. 이는 독립군이 총과 탱크 등 무기를 무장한 러시아군대로부터 사살 당한 사건이다.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소련은 일본과 어업조약으로 무기와 식량을 획득했고 일본이 요구한 독립군 활동 중지를 받아들였다. 결국 1921년 6월28일, 소련은 한국독립군을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 것이다.
자유시참변 당시 희생자수는 사료마다 다르다. '재로고려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행방불명 59명으로 기록돼 있다.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 따르면 자유시참변 사망자는 272명이었으며 250명이 행방불명됐고 포로는 917명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1000~1500명이 희생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병기 대한민국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회 박사는 "학자마다 학설이 다 다르지만 2500명 정도의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했다. 서로 2000명 규모의 군대를 탐을 내다 군권쟁탈전에서 희생됐다"며 "강에 빠진 사람, 사살된 사람이 몇 백명, 포로가 된 사람이 800~900명, 장교도 70~80명 잡혀갔다고 기록돼 있는데 1000~1500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집계된다"고 설명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아픔의 역사를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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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은 일제시대, 근대시대의 역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35년간의 일제시대의 정확한 역사 기록이 부족한 것은 이미 사회, 정치, 경제의 핵심 분야와 인물 등에 일제의 잔재가 깔려 있는 것도 한 이유다.
김 박사는 "광복 후 70년 친일 청산이 아직 안됐다"며 "역사적 사실을 책에도 교과서에도 정리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대학에서 독립운동사 연구가 시작됐다. 해방은 1948년에 됐는데 왜 뒤늦게 연구를 시작했겠느냐"며 "그때는 이미 현장 당사자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 기록을 정확하게 남길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전 정권에서도 역사 기록, 교육에 대해 말이 많았는데, 이번 정권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변상문 국방국악문화진흥회 이사장은 군대 생활 33년만에 대령으로 제대했지만 군시절 6·25 전쟁 외에 한국의 전쟁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변 이사장은 "세계대전 등 해외 전쟁 역사는 교육해도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 교육은 없었다. 임진왜란도 청일전쟁에 대해서도 배운적이 없다"며 현실을 꼬집었다.
이 소장은 국민들이 3·1운동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이유가 역사계에 뿌리박힌 식민사관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아직까지 식민사학이라 불리는 조선총독부 관점으로 보고 있다. 아직까지도 식민사관의 후예들이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고 있어서 한국 역사는 일본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89hklee@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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