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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오후 한 詩] 그리하여 고슬고슬/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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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물 맞춰 쌀을 안친다

안친다는 건 쌀이 걸어온 길에 대해 묻고 이해하는 일

그가 맞은 햇볕과 비와 바람의 질량을 가늠하는 일

그가 걸어온 길을 손금으로 들이는 일

가래 끓는 가슴으로 밑동부터 잡아 일으킨 한 사람의 생과

그늘과 양지와 대지의 사연을 듣는 일

뿌리의 말을 다듬고 솟는 줄기의 힘을 만지고 낱알 영그는 노고를 집에 들이는 일

주저앉는 등허리와 기울어 가는 서까래의 늙음에

고스란히 심장 박수 맞추는 일


쌀뜨물처럼 저녁이 오고

손등으로 깊이를 가늠한다


그리하여

고슬고슬한 당신과 나란히 밥상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꼭꼭 씹는 것이다


아시아경제

■당신은 당신의 저녁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말하자면 오늘 당신의 저녁 식탁 위에 오른 된장찌개 속의 호박과 두부, 고등어와 무, 콩나물과 김이 "걸어온 길"과, 그 속에 맺힌 "그늘과 양지와 대지의 사연" 그리고 "주저앉는 등허리와 기울어 가는 서까래의 늙음"에 대해 잠시라도 고개를 숙여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매일 입는 옷과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와 출퇴근할 때마다 지나다니는 길에는 모두 무수한 "사람의 생"과 숱한 "노고"가 깃들어 있다. "뿌리의 말"을 향하고 있는 이 시는 생각보다 급진적이며 다분히 정치적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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