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에 지지 않겠다"… 구한말 외교관의 각오

월남 이상재

주미 공사관 서기관 시절 대미외교 자료 130년만에 공개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개국으로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때 만약 조금이라도 꺾이면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1887년 주미(駐美) 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돼 미국 땅을 밟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1888년 4월 13일 편지에서 그는 '중국 공사는 매번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한다'면서도 외교 활동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구한말 약소국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울분과 기개가 드러나는 육성이 13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1841~1905)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이상재가 1887년 8월부터 1889년 1월까지 가족에게 보낸 편지 38통을 묶은 '미국서간(美國書簡)'이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월남의 종손인 이상구(74)씨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해온 문헌과 사진 등 8점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며 13일 공개했다.

왼쪽은 1888년 주미(駐美) 공사관 서기관 시절의 월남 이상재 선생. 오른쪽은 그가 공사관에서 재직하며 가족에게 보낸 편지다. /문화재청

월남의 눈에 비친 미국은 생경한 나라다. 1887년 11월 8일 편지에선 처음 접한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놀라움이 묻어난다. '이 나라 풍속은 국민(民)을 주권(主權)으로 삼는다. 소위 군주는 4년마다 교체되고, 인민이 회의해서 차출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권한이 없고, 오로지 민의(民意)를 주로 삼을 뿐이다.'

중국 공사와의 갈등도 주된 내용이다. 이상재는 '중국 공사는 우리나라 공사의 위에 서고자 하고, 우리 공사 역시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한다'며 '중국 공사가 매번 트집을 잡아 정말 소위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처지'라고 토로했다. 박정양 공사와 이상재는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한 뒤 국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청의 압력으로 채 1년도 미국에 머물지 못했다.

자료를 분석한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미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라며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관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공사관원들이 직접 기록한 자료가 발견돼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이상재는 훗날 조선일보 사장과 일제강점기 최대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을 지냈다.





[허윤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