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22)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점에 관한 한 축복받은 사람이다. 100% 흔쾌하지 않지만 가자면 마다는 않으니 지금껏 20여 년 넘도록 산막 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동안 그 길 함께 오가며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로부터 깨닫고 배운 일도 참 많다. 몇 가지 간추려 본다.
분노의 설거지
아내가 말한 '직접 해 버릇'의 시작, 설거지. 설거지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즐겁다. [사진 권대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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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 이제부턴 회사에서 웬만한 일은 남 시키지 말고 직접 해 버릇해요.
나 : 응 알았어.
곡우 : 우선 집안일부터 그렇게 해봐요.
나 : ….
닥치면 다한다. 아직은 하기 싫지만, 가끔 설거지 도와주고 있다. 안 해서 그렇지 잘한다. 자취도 해봤고 산속에서 몇 년 칩거도 해봤으니 할 줄 안다. 중요한 건,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이런 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즐겁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모든 게 마음이다.
설거지뿐이랴, 모든 것이 그렇다. 겉보기엔 한량없이 평화롭고 아무 일 없는 듯 보이는 현상 너머엔 얼마나 많은 치열함과 모순이 숨어 있는가. 평화롭게만 보이는 숲속에도, 아무 일 없을 듯한 저 깊은 물 속에도, 그리고 이 작은 산막에도 치열한 모순과 그 모순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있을 것이다.
겨울은 수난의 계절이다. 배관이 얼어 터지고, 보일러가 잘 돌지 않으며, 수도전이 새고, 변기가 얼어 터지는 등 많은 문제가 있지만 당장 손 보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늘 찌꺼기처럼 마음에 남고 고이는 것이지만 이젠 이마저도 이력이 나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늘 상주하지 않는 자유로움에 대한 합당한 거래 정도로 생각하고 감내하며 마음에 두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예외도 있긴 하다. 어느 날 밤 한밤중에 물소리 들려 나가보니 곡우 초당 옆집 보일러 인입구가 동파돼 물줄기가 하늘로 솟고 난리가 난 상황이 벌어졌다. 밸브도 못 찾겠고 물은 차단해야겠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도리 없이 밭 가운데 있는 펌프실을 열고 수중펌프 전원을 꺼야 했었다.
오래 방치하면 펌프마저 얼 위험이 있으니 마음에 크게 걸릴 법도 하건만 그런데도 깊은 잠을 잘 잤으니 이제 마음 근육과 내성이 꽤 단련된 듯도 싶다. 이런 내성이 하루아침에는 절대 얻어지지 않는다. 산막 생활 20년 동안 겪었던 수많은 난관과 대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닌가 싶다. 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성숙해지고 지혜로워진다.
한밤중에 물소리를 듣고 나가보니 보일러 인입구가 동파돼 물줄기가 하늘로 솟고 난리가 났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숲속 산막에도 난관과 모순이 존재한다. [사진 권대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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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현상 너머를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되고, 지혜를 터득해 간다. 그러니 나이 듦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나이 든다는 것이 늙어감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하는 요즘, 나는 결코 예단하거나 서둘지 않는다. 산막도 같고 회사도 같고 나라도 같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다.
이렇듯 겨울 산막은 시련의 연속이다. 얼고 터지고 새고 막히고 모든 것이 불편하다. 그런데도 산막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나는 변함없이 사랑하니 내게 산막은 진정 무엇인지 모르겠다. 보일러실 동파는 이웃집 하 원장을 청해 간단히 해결했고, 밥하고 설거지할 꼭 필요한 물은 집 앞 수도전에서 해결했다. 싸늘한 겨울 찬바람 맞으며 물통 들고 물 받는 재미는 물지게로 물 길어 먹던 옛날을 생각게 한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살 만한가. 그러니 바로 집 앞에 아무리 날 추워도 절대 얼지 않는 부동의 수도전 하나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바로 이웃에 이것저것 못 하는 것 없고 아침부터 불러도 싫은 내색 없이 달려와 주는 이웃 하나 있음은 또 얼마나 다행인가.
터진 배관 고치고 물병에 물 다 채우고 좋은 음악 들으며 닭 다리 뜯고 앉았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물은 날 풀리면 절로 녹을 것이고 부서진 수도전은 차차 고치면 될 것이니 이만해도 감사하는 마음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하다.
모든 것이 마음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무리 시련이 있더라도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범사에 고마워하는 마음,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긍정의 마인드가 있으면 외롭지 않다. 그러니 왜 감사하지 않을 것이며, 왜 긍정하지 않을 것인가.
아버지는 내가 설거지하는 영상을 보고 고향의 백부께 문자를 보냈다. 지금 거의 100수를 바라보는 연세다. 백모의 장례 때 입관시키며 “여보 사랑해요”라고 말해 우리를 감동하게 했던 어른이다. “애비야 네가 설거지로 네안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너희들도 이제 노년에 접어들고 있으니 너희 부부 더욱 서로서로 사랑하고 금실 좋은 부부로서 인생의 승자가 되길 축원한다.”
지갑 소동
놓고 온 지갑을 아내가 회사로 가져다준 덕에 장충단공원에서 비빔밥 데이트를 했다. 놓고 오는 버릇은 언제 고치려나. [사진 권대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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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다 와서야 지갑 놓고 온 것을 알았다. 좀 늦게 출발하는 하 원장과 연락이 돼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산 아래까지 내려간 사람의 차를 되돌려 지갑 찾게 한 것도 미안한데, 더 미안한 것은 그 지갑에 현금이 한 푼도 없다는 거다. 정말 단 한 푼도 말이다 ㅎㅎ. 가스 배달 아저씨가 가스통 값 어쩌고 하는 바람에 이거밖에 없는데 하니 그거라도 달라고 해 있던 현금 몽땅 털렸었다.
생각해보니 서울 다 와서 알아 다행이고(아니면 중간에 돌아갈까 말까 갈등했을 텐데), 하 원장이 연락되어 다행이고(아니면 오늘 밤 다시 가야지 별수 있나), 집사람이 명퇴해 다행이다(지갑 회사로 가져다준다 하니). 지갑 벨트 안 챙기고 오는 게 한두 번도 아닌지라 이야기해 봐야 잔소리 뻔하고 그냥 버틸 작정으로 있었는데 전화로 갖다 주겠다 한다. 동대역으로 오라 하고 장충단공원에서 비빔밥 데이트를 한다.
이렇게 다행한 것투성인데 이놈의 놓고 오는 버릇 언제나 고치려나. 올 때 집사람에게 뭐 잊은 거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아 또 하나, 부러진 파라솔 대 잘 고쳐지려나 모르겠다. 사람은 뭐 대단한 일로만 걱정하는 게 아니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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