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주역 이야기
최영진 성균관대 명예교수 [사진/조보희 기자] |
역은 '변한다'는 뜻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에서 인간의 규범을 발견한 것을 말한다. 주역을 영어로 'The Book of Change'(변화의 책)로 번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夏), 은(殷), 주(周) 때 각각의 역이 있었는데 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성립됐다고 한다.
주역은 가장 오래된 동양 경전이자 가장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점(占)을 치는 책으로 알려진 주역이 어떻게 유교 경전에 포함됐을까.
최영진(67)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주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음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균형인데, 인간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준다"고 말하고 "현대에도 주역은 수많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중용(中庸), 주역 등의 경전과 성리학, 실학 등의 한국 유학을 연구해 왔다. 주역을 연구하며 한때 대중들이 주역에 쉽게 접근하도록 '만화로 보는 주역'을 펴내기도 했다. 최 교수에게 주역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 동양철학을 어떻게 공부하게 됐나요.
▲ 고등학교 때는 문학 소년이었어요. 특히 소설을 좋아했는데 인생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죠.
당시 '사상계'란 잡지를 탐독했는데, 거기에서 동양철학의 심오함에 대해 말하는 윤성범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의 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동양은 후진적이고 서양은 훨씬 앞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죠.
그때부터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동양적인 정신이 깃든 작품을 쓴 헤르만 헤세를 좋아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 주역은 무엇입니까.
▲ 주역은 본래 점을 치는 책, 즉 점서(占書)입니다. 하지만 원래 주역은 개인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것이 아니었어요. 군주가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 방법의 하나였어요. 군주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 자기 자신, 측근, 신하, 백성에게 물어본 뒤에 점을 쳤죠.
점에는 복(卜)과 서(筮)가 있습니다. 복은 거북 등껍질이나 짐승 뼈를 불에 구워 갈라진 모양을 보고 점을 치는 거죠.
주역의 점인 서는 시책(蓍策, 시초라는 식물 줄기를 말린 막대)이나 서죽(筮竹, 대나무 막대)으로 일정한 수리적 조작을 통해 점을 치는 거예요.
주역은 서법(筮法, 점치는 방법)을 위해 편찬된 것으로 의심나는 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주역의 원형은 무엇인가요.
▲ 중국 은나라 때 수백 년간 축적된 갑골문이 바로 주역의 원형입니다. 군주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갑골문을 사용했어요.
군주는 정인(貞人)을 통해 점을 쳤죠. 정(貞)이란 글자는 복(卜)에 거북이 껍질(貝)이 붙은 모양입니다. 즉 정인은 거북이 껍질로 점을 치는 사람이죠. 군주의 명을 받아 하늘에 물어본 후 의사결정을 했어요.
공자는 이렇게 예부터 내려오던 문헌 중에 시경, 서경, 주역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교과서로 삼았습니다.
-- 주역의 원리는 어떻게 되나요.
▲ 태극에서 양의(兩儀, 음양)가 생겨나고, 양의에서 사상(四象), 사상에서 팔괘(八掛)가 나왔습니다.
주역은 음이 있으면 반드시 양이 있고, 양이 있으면 반드시 음이 있다고 합니다.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해요. 또 불행이 있으면 반드시 행복이 있으니까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불행하면 거기에서 이미 행복이 싹트고 있고, 행복의 아래에는 이미 불행이 엎드리고 있는 거죠.
주역은 장단점을 동시에 보고 대칭적으로 생각하라고 합니다. 사람도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죠.
-- 문자가 아닌 괘(卦)와 효(爻)라는 상징 부호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결승문자설(結繩文字說)이란 게 있어요. 옛날에는 문자가 없으니까 끈을 묶어서 의사를 표시했죠. 이분법적으로 좋으냐/나쁘냐, 옳으냐/그르냐를 끈을 풀거나 묶어서 나타낸 거죠. 남녀 생식기를 본떴다는 설도 있어요.
어쨌든 결승(結繩)은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나타내는 기호였죠. 효는 이런 기호에서 출발해 더 세분된 거예요.
음과 양의 효가 모여 사상, 팔괘가 되고, 다시 팔괘가 모여 64괘가 되어 주역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성립된 겁니다. 즉 문자보다 이런 상징이 먼저 생겨 문자 역할을 한 거죠.
-- 점서인 주역이 삼경에 포함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 고대 중국에서는 상제(上帝)가 인간계와 자연계를 모두 지배한다고 생각했어요. 천자는 상제에게 좋은 재물을 바치면 복을 받아 국가를 잘 통치할 수 있다고 여겼죠. 인신 공양을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은말주초(은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가 되면서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하늘은 인간이 바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의 덕(德)을 좋아한다는 거죠.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는 사람인데 하늘은 덕이 있는 사람에게 명을 내린다고 합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곧 민심을 얻은 자를 말합니다. 즉 민심이 천심인 거죠.
세계관이 달라지며 점에 관한 인식도 변화하죠. 점은 원래 하늘에 길흉(吉凶)을 물어보는 것인데, 이제 도덕적으로 바르면 길하고 그렇지 않으면 흉하다는 것으로 바뀝니다.
주역을 보면 항상 전제가 붙어 있어요. 주역의 첫 번째 괘인 건괘(乾卦)의 괘사(卦辭, 괘의 길흉을 판단하는 글)는 '원형이정'(元亨利貞)입니다. 크게 형통한 괘죠. 하지만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올바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거죠. 크게 형통하다는 건괘도 도덕적으로 정당하게 행동할 때 비로소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주역 64괘 중 가장 좋은 괘는 15번째인 지산겸(地山謙) 괘입니다. 땅 밑에 산이 있는 모양이죠. 이 괘는 바로 겸손을 상징해요. 괘의 모양을 보고 겸(謙)이란 이름을 붙인 거죠. 겸손이란 뜻을 부여하고 지향할 도덕 규범으로 만든 거예요. 이 괘는 원래 땅 위에 있어야 할 산이 땅속에 있듯이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천우지 길무불리'(自天祐之 吉无不利)란 말도 있어요.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으니 길하고 이롭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이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의미예요.
하늘과 인간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거죠. 인간이 도덕적으로 규범을 잘 수행할 때 비로소 하늘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도덕적 규범에 맞게 행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의 행동에 상응해 복이나 재앙을 내린다는 거예요.
-- 주역을 세심경(洗心經)이라고 하는 이유는 뭡니까.
▲ 주역으로 점을 치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데, 십팔변서법이라고 18번의 과정을 거쳐야 괘가 나옵니다.
그런데 점을 칠 때는 무사무위(無思無爲)의 상태여야 해요. 즉 어떠한 생각이나 인위적인 행위가 없어야 합니다. 적연부동(寂然不動), 즉 아주 고요하고 어떤 움직임도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해요.
점괘를 보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세심경이란 말이 붙은 겁니다.
최영진 교수는 "갈등이 첨예한 오늘날, 주역의 상반상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조보희 기자] |
-- 주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 가장 중요한 것은 중(中)입니다. 중은 괘의 길흉을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이죠. 주역은 음양이 균형을 맞춘 상태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봐요. 어느 한쪽의 세력이 강하면 기울어지죠. 음양이 균형을 맞출 때 서로 감응하고, 창조가 가능해요.
상반상성(相反相成)도 중요합니다. 서로 반대인 음과 양의 힘이 대등하면 흔히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주역의 38번째 괘는 규괘입니다. 불은 위로 올라가고 연못이 아래로 흘러가는 모습으로 서로 갈등하고 외면하는 형국이에요.
하지만 상구효(上九爻, 이 괘의 마지막 효)는 멧돼지가 흙을 뒤집어쓰고, 귀신이 수레를 타고 달려들어 활을 쏘려 하다 봤더니 그것이 도적이 아니라 혼인할 짝이라고 풀이가 됩니다. 이 괘는 상반되는 존재야말로 소중한 파트너라는 것을 강조하죠.
우리 사회를 보면 남과 여, 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등으로 이분화되어 서로를 적대시합니다. 하지만 주역은 이런 상대방이 적대시할 대상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상대방이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서로가 반대이기 때문에 감응해 합쳐질 수 있는 겁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오히려 서로를 완성해 준다는 것이 주역의 기본 입장입니다.
-- 현대사회에서 주역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요.
▲ 갈등이 첨예한 오늘날, 주역의 상반상성(相反相成)이 중요합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 반대여야 정상이에요. 어느 한쪽만 있으면 안 되죠.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인정하고 균형을 맞춰야 해요.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상대방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말고 파트너로 여겨야 합니다.
남녀도 마찬가지예요.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는 겁니다. 상대방은 소중한 짝인 거예요.
자신과 똑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은 사실 해(害)가 되는 존재예요. 대통령이 하는 일마다 "각하가 옳습니다"라고 하는 장관은 대통령을 망치는 사람이에요. 반대하는 장관이 진짜 올바른 관료입니다.
논어에는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군자는 남과 조화를 이루지만 남과 동일하지는 않다는 뜻이죠. 춘추에도 화(和)와 동(同)이 다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군주가 가(可)라고 하면 신하는 불가(不可)라 하고, 군주가 불가(不可)라고 하면 신하가 가(可)하다고 해야 하죠. 즉 신하는 가(可)라고 말한 군주에게 불가(不可)하다고 함으로써 군주의 가(可)함을 완성해 줍니다. 이게 바로 화(和)예요.
반대로 군주가 가(可)라고 말하는데 신하도 가(可)라고 하는 것은 동(同)이에요.
맛있는 국을 끓이려면 소금만 넣으면 안 되고 고춧가루, 파, 고기 등 서로 다른 맛을 내는 재료를 넣어야 해요. 이를 가부상제(可否相濟)라고 합니다. 가(可)와 부(不)가 서로를 구제해 준다는 뜻이죠. 예스맨만 있어서는 안 돼요.
가부상제가 되기 위해 군주는 신하를 인정해줘야 하죠. 군주의 주장에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해요. 이것이 바로 군주의 덕(德)이죠. 군주는 반대하는 신하가 밉겠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덕을 가져야 합니다.
-- 주역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 논어, 맹자, 춘추는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성현(聖賢)이 자기 생각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역에는 객관적인 규칙이 있어요.
주역의 논리에 의하면 땅 위에 있는 산도 있지만 땅 밑에 있는 산도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의미를 찾는 거죠. 주역은 자연에서 당위 규범을 끄집어냅니다.
주역의 대상전(大象傳, 괘상을 전체적으로 풀이한 것)을 보면 앞에 괘상, 다음에 규범이 나와요. 건괘(乾掛)를 보면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이라고 나오는데 '천행건'(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니)은 괘상이고 '군자이자강불식'(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써서 스스로 강건하여 쉬지 않는다)은 규범이에요.
즉 주역은 자연현상에 근거를 두고 규범을 도출하기 때문에 필연성을 갖습니다. 괘의 모양을 보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을 끌어내죠.
그런 행동에 대한 보상이 바로 길흉(吉凶)이에요. 주역은 괘의 모양을 통해 응원하기도, 경고하기도 합니다.
-- 주역으로 점을 치신 적이 있나요.
▲ 답답하면 점을 치기도 합니다. 예전에 나이가 들어도 결혼하지 못하니까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 거예요. 결혼할 사람은 없고 결혼은 해야겠고 답답한 마음에 점을 쳐본 적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결혼을 하기는 했습니다. 원래 주역을 잘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고 해요. 점을 칠 필요가 없는 거겠죠.
-- 주역과 관련한 고사나 일화가 있습니까.
▲ 춘추좌씨전에 보면 소공 12년에 남괴가 모반할 마음을 먹고 주역으로 점을 쳤는데 아주 좋은 괘가 나왔어요. 그런데 현자인 자복혜백이 바른 마음으로 점을 쳐야지 이런 나쁜 일에 대해 점을 치면 아무리 좋은 괘가 나와도 소용이 없다고 해요. 남괴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모반을 했다가 결국 실패하죠.
이순신 장군도 임진왜란 때 전투를 앞두고 주역으로 점을 쳤다고 해요. 주역은 괘와 효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현대에 들어 주역의 원리를 가장 잘 수용한 사람은 양자역학의 세계를 개척한 닐스 보어예요. "반대되는 것은 상호보완적이다"라는 상보성(相補性) 원리를 제시하면서 음과 양이 서로 맞물려 있는 태극 문양을 사용했죠.
상보성 원리는 바로 상반상성이에요. 그만큼 주역의 원리는 과학적이고 보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카를 융은 주역 영문판의 서문을 쓰고, 실제 점을 칠 정도로 주역에 심취했다고 해요.
현대에 갈등이론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중에도 주역의 논리를 수용하는 경우가 있죠. 서로 반대되는 것은 갈등하지만, 갈등은 해소만 된다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어요.
-- 갈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 건괘에 보면 '종일건건 석척약 려무구'란 구절이 있어요. 상황이 굉장히 어려워도 종일 애쓰고 저녁때까지 두려워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풀이됩니다. 끊임없이 경계하고 노력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거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적대시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봐야 해요. 똑같은 생각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끼리는 갈등이 없는 대신 발전도 없죠. 서로 싸워야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 학부 때 가르치던 학생들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는 대학원 강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 학기에 포천에 있는 대진대학교에서 주역 계사전을 주제로 강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 부설 한문 고전 교육기관인 한림원의 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중용과 주역을 강의하고, 7년 전 한국철학사 집필 작업을 시작했는데 계속해야죠. 완료하려면 앞으로 10년도 더 걸릴 것 같아요. 한국철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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