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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 당시 중국·대만에 큰 영향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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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개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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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이 당시 재일(在日) 중국 및 대만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중국의 5·4운동과 대만의 자치운동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노 야스테루(小野容照) 규슈대(九州大) 교수는 이런 내용을 담은 논문 ‘동아시아사 속의 2.8독립선언’을 9일 일본 도쿄 재일한국YMCA에서 개최될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서 공개한다.

논문에 따르면 대만 유학생들은 당초 대만인과 일본인이 법률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두 나라의 ‘동화주의(同化主義)’를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일제의 행태를 보면서 동화주의가 법률적 동화만이 아닌 문화적 동화까지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한 뒤 대만자치 운동을 펼치게 된다. 다만 대만 유학생들은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하는 한국 유학생들과는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 자체는 부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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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독립운동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2·8독립운동 3개월 후에 전개된 중국의 5·4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오노 교수는 “중국의 5·4운동은 파리평화회의에서 일본이 쥐고 있던 산둥반도 이권을 회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주 요인이지만, 2·8독립운동 및 3·1만세운동이 중국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돼 중국인의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중국인 유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통사’를 탐독했다는 사실도 공개될 예정이다. 1915년 중국 상하이에서 순한문으로 발간된 ‘한국통사’는 조선이 식민지화되기까지의 역사를 민족주의 사관에 의해 그린 책으로, 나라가 망해도 민족의 혼이 살아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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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무성에 따르면 2·8독립선언 운동이 발생하기 2년 전인 1917년 7월에 조선인 유학생들은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통사 200부를 주문해 도쿄 유학생들에게 배포했는데, 이 과정에 중국인 유학생 요천남(姚薦楠)도 참여했다. 또 일본에서 결성된 한·중·대만 3국 유학생들의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1915년 창설)의 단장을 맡았던 황제민(黃介民)은 자기 침실에 ‘한국통사’를 숨겨놓고 읽기도 했다.

서정민 메이지학원대학(明治學院大學) 교수는 이날 발표할 논문 ‘한일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서 일본 기독교인들의 양분된 반응을 자세히 소개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3·1운동을 한국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애국심과 미성숙한 유대주의적 신앙심에 의해 야기된 소요사태로 진단하는 측(와다세 츠네요시 등)과 조선총독부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야기된 불만이라는 측(요시노 사쿠조 등)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국인들의 독립 요구에는 침묵한 채 일제의 한국통치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9일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 이어 15일에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만세운동이 전개된 일본 오사카 재일한국기독교회관에서 ‘2·8선언 및 3·1운동과 한국 식민지 통치체제의 전환,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립운동’ 등에 대한 학술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도쿄=성동기기자 esprit@donga.com
안영배 논설위원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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