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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박물관 상설전, 식민주의 정교화와 맞물려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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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찬 이화여대 교수, 1915∼1926년 상설전 변천 분석

연합뉴스

조선총독부박물관 전경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총독부가 1915년 경복궁에 건립한 박물관의 상설전 변천 양상을 보면 식민주의 역사학이 정교화된 과정을 알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제110호에 실은 논문 '식민지 박물관의 역사 만들기'에서 1915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총독부박물관 상설전 변화상을 분석했다.

총독부박물관이 식민주의 역사관 구축과 선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기존 연구에서 확인됐으나, 대부분은 박물관 설립 초기에 대한 고찰 없이 1921년 이후 상설전만을 대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오 교수는 이번 논문 작성에 앞서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자료인 '조선서화고기물목록'(朝鮮書畵古器物目錄)과 '조선총독부박물관개요'를 각각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찾았다.

'조선서화고기물목록'은 754쪽 분량으로, 1915년 12월 1일 개관한 총독부박물관 상설전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는 내용이 담겼다. 1921년 3월 26일에 작성된 '조선총독부박물관개요'는 박물관 전시품 범위와 전시 방법·내용을 정리한 문서다.

오 교수는 이 자료들을 검토해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 공진회' 직후 개관한 총독부박물관이 초기에는 공진회 전시와 유사했다고 설명했다.

총독부박물관은 1층 동쪽에 역사참고품, 서쪽에 도자기, 중앙에는 대형 불상을 배치했다. 2층은 동쪽에 서화와 금석문, 서쪽에 불상·금속제품·목제품, 행랑에 석기와 골각기를 진열했다.

오 교수는 "외부 출품에 의존한 공진회 미술관과 달리 총독부박물관 개관 전시는 자체 확보한 소장품으로 꾸몄다"며 "유적 발굴품을 비롯해 악기, 화폐, 목판 등을 선보인 역사참고품실을 제외하면 재질별로 전시실을 구성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역사참고품은 발굴 유물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며 "경주 보문리 고분, 부여 능산리 고분 등 1915년 개관 전후에 발굴한 유적의 고고학 자료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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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박물관 내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총독부가 1916년 고적조사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박물관 소장품은 지속해서 늘었고, 1918년에는 근정전과 사정전 등이 전시 공간으로 재편됐다.

총독부박물관은 1921년 전시실을 개편하면서 재질별 전시를 시대·주제별 전시로 바꿨다고 오 교수는 분석했다.

당시 박물관은 제1실에서 유적 발굴품으로 고대 통사를 소개했다. 제2실은 '풍속과 문예', 제3실은 '종교'와 관련된 유물로 각각 채웠다.

시대별·주제별 전시는 1926년 박물관 개편과 맞물려 더욱 체계화됐다. 오 교수는 "1926년 단계에서 제1실은 임나일본부를 강조했고, 제4실은 낙랑대방실을 조성해 전면적으로 부각했다"며 "제3실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와 금속 공예를 통사적으로 정리해 일본이 대신해 조선의 공예미술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역할을 자임했다"고 주장했다.

오 교수는 "총독부박물관 상설전은 1926년 단계에서 식민주의 역사학에 기반한 시대별 전시로 완성됐다"며 "1915년 이후 변화는 식민주의 역사학 연구의 축적과 박물관 소장품 확충을 통해 점진적 과정을 거쳐 이뤄졌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어 "총독부박물관 상설전에서는 조선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식민지민 스스로 자각하도록 하려는 식민주의 역사관의 재현이 지속해서 추구됐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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