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이 모 할머니 28일 한날 별세
우리 곁 떠난 김복동 할머니 |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흔히들 '소풍'이라 하는 인생을 한 순간도 맘 편히 누려보지 못한 채 위안부 피해자로서, 여성 인권운동가로서 평생 살아온 할머니 두 분이 28일 한날 세상을 떠났다.
28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따르면 이날 오후 10시 41분 김복동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김 할머니에 앞서 이날 오전 7시 30분께는 또 다른 슬픈 소식이 먼저 들려왔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 모 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김 할머니와 이 할머니는 지금으로 따지면 중고등학생 시절인 10대 중후반에 일본군에 끌려갔다.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만 14세이던 1940년 위안부로 연행됐다. 중국과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꽃다운 삶이 짓밟혔다.
위안부 참상 알린 김복동 할머니, 마지막 남긴 말 "일본에 분노" / 연합뉴스 (Yonhapnews)
김 할머니는 1945년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제16사령부 소속 제10육군병원의 간호사로 위장 배치받아 일본 군인들의 간호 노동을 하다가 버려졌다. 이후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1947년 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째 되던 22세에 고향 땅을 밟았다.
이 할머니는 17세가 되던 1942년 직장인 방직 공장에서 퇴근하던 길에 군인에게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후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에게 인권을 유린당했다.
이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일본군이 오지 않아 해방된 것을 알았고, 밀수선인 소금 배를 타고 귀국했다. 고향 땅에서 그를 괴롭힌 것은 죄책감과 피해 의식이었다.
이들 할머니는 위안부로 청소년기를 짓밟혔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별세 |
윤미향 정의연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이 할머니는 오랫동안 고통을 잊지 못하시고 늘 얼굴에 그늘이 져 계셨다"며 "찾아뵐 때마다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운 괴로움과 외로움을 보며 안타깝고 아팠지만, 그래도 활동가들을 보시면 무척이나 반가워하시고 집에 잘 돌아갔는지 확인 전화도 하실 정도로 정이 많으셨다"고 이 할머니의 온화한 성정을 설명했다.
김 할머니는 여성 인권운동가로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김 할머니는 1992년 3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쓰라린 기억을 증언했고, 이듬해 6월 오스트리아 빈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높였다.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인권운동가로 활동해온 김 할머니는 아픔을 딛고 거의 전 재산을 후진 교육을 위해 기부했다.
김 할머니의 장례식은 '여성인권운동가 김복동 시민장'으로 진행되며 발인은 2월 1일이다. 이 할머니는 그와 유가족의 뜻에 따라 장례를 비공개로 진행한다.
so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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