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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단독] '체육계 미투 시작' 김은희 "가해자는 죄의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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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체육계 곳곳에서 성추행·성폭행 고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일명 체육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다. 사실 체육계 미투의 시작은 2016년 10월 김은희(28) 테니스 코치로부터 시작됐다. 김 코치는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테니스부 코치를 고발하고, 징역 10년형을 이끌어냈다. 이후 자신과 똑같은 피해를 당한 선수들을 도와주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알리고, 관계 기관에 수차례 피해자를 위한 제도를 만들어달라고 호소했지만 체육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래서 김 코치는 17일 피해자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김 코치와 인터뷰를 편지 형식으로 정리했다.




중앙일보

'체육계 미투'를 처음 시작한 테니스 김은희 코치가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테니스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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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3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심 판결에서 열 살이었던 나를 수차례 성폭행한 테니스 코치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죠. 주변에서는 "이겨서 축하한다"고 하는데 기쁜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참 울었습니다. 어린 김은희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이후에도 법정 공방은 계속됐습니다.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의 실형이 확정됐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까지 꼬박 2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냐고요? 어떤 단어로도 표현을 잘 안될 것 같아요. 수면장애, 불안, 악몽, 소화장애…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에 들어도 아침마다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제가 그랬던 것처럼 고통을 받고 있는 체육계 선후배, 동료들이 있겠죠. 그래서 제가 어떻게 용기를 내고, 승소할 수 있었는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이듬해까지 강원 철원군의 초등학교 테니스부 코치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코치는 "죽을 때까지 너랑 나만 아는 거다. 말하면 보복할 거다"라고 협박했죠. 배가 아프고 출혈이 났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저는 그게 성폭행이라는 사실 자체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내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걸 알고 15년이 지나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중앙일보

'체육계 미투'를 처음 시작한 테니스 김은희 코치가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테니스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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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인 도움을 준 건,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대한테니스협회 등 체육계 관계 단체들이 아니었습니다. 신고센터 담당자와 연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문체부 조사관은 성범죄에 관련한 단어도 잘 모르고 있었죠. 반면에 일반 성폭행 상담소인 여성의 전화, 해바라기 센터 등은 전문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피해자 편에 서서 지원을 해줬습니다.

체육 관계 기관들은 피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있는 중립적인 기관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분명히 체육 관계 기관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피해자를 위한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 성폭행 상담소에 도움을 요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피해자들은 또 자신의 경력이 끝날까봐 두려워 말을 못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테니스 지도자라는 꿈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코치를 고발했습니다. 그 사이 체육학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고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에 주변에서 '성범죄 피해자'란 프레임 없이 '지도자 김은희'로 봐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고양시 한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금이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중앙일보

'체육계 미투'를 처음 시작한 테니스 김은희 코치가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테니스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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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다른 피해자 선수들에게 제가 감히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게 겁이 납니다. 모두 저처럼 승소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저는 사건을 해결하면서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용기를 냈다는 이유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면, 저는 '용기내라'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호소합니다. 선수 피해자들 편에 서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시스템으로 바꿔달라고.

저는 요즘 가해자 코치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피해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제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만으로 '꽃뱀'이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거기다 형사소송에서 승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법 해석으로는 민사소송을 통해 보상받기가 어려운 실정이란 걸 알았습니다.

피해자들은 성폭행은 당한 후, 운동도 제대로 못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듭니다. 저도 수시로 병원에 다녀야했고, 소송을 준비하면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성폭행 피해 고백 이후에도 보상을 받는 체계가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다. 가해자들을 형사 처벌하는게 우선이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들의 삶이 완전히 회복되고 치유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가해자 코치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발 알아주세요. 어린 선수들에게 하는 성추행과 성폭행은 아주 잘못된 행동입니다. 당신들의 행동이 우리들에겐 평생의 아픔으로 남아요. 지금 감옥에 있는 제 사건의 가해자는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모릅니다. 가해자들은 죄의식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걸까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건 '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평생 운동만 하고 산 그들에게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성적 지상주의 속에서 자란 우리나라 체육계가 만든 씁쓸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계속 제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해자 코치들을 거울삼아 더 좋은 지도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유명 선수의 피해 고백으로 수사 속도와 여론 반응이 달라지는 모습이 아쉽기는 합니다. 그동안에도 일반 선수들의 피해 고백이 가끔 있었거든요. 한 테니스 선수 출신 여성이 1998년 초등학생 6학년 때 학교 테니스부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난해에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교육청, 교육부가 제대로 조치해주지 않아 엄청난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크게 이슈가 되면서 관계 기관들이 피해자를 위한 제도를 만들고 시스템에 변화를 준다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부디 단발성 이슈로 끝나지 않길 바랍니다.

정리=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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