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7.06 (토)

“한국 연극, 미국의 지역연극서 배워야 산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원로 연극평론가 김미혜 교수가 말하는 ‘한국 연극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할까’

경향신문

연극평론가 김미혜 교수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한국 연극의 지속가능한 발전,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인터뷰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대학에서 정년을 1년 밖에 안 남긴 교수가 한번도 가르쳐보지 않은 과목에 도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70)는 ‘사서 고생’을 택했다.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빈국립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1979년 귀국한 이후, 그가 대학에서 내내 가르친 것은 ‘유럽 연극’이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과목’으로 자진 선택한 것은 ‘미국 연극’이었다. 그는 “나도 미국 연극을 잘 몰랐어요. 헤매면서 가르쳤죠”라며 껄껄 웃었다. 한데 ‘사서 고생’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한 학기 수업을 마치자 도전 의식이 꿈틀거렸다. “내가 가르친 내용에 대해 어떤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아, 이래선 안되겠다, 미국에 가서 현장 취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죠.”

두 차례에 걸쳐 미국 종·횡단하며

연극의 중심인 ‘지역연극’ 발품

결과물 ‘브로드웨이를 넘어’ 펴내


그렇게 미국으로 떠나 렌터카를 빌려 타고 약 20개 도시를 돌았다. 발품을 판 지역은 미국 연극의 메카처럼 인식되고 있는 뉴욕 브로드웨이가 아니었다. 미국의 곳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지역 연극’을 이끌고 있는 극단과 극장들이었다. 그렇게 한 바퀴 돌자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왔다고 했다. “미국 연극의 중심은 브로드웨이 상업극이나 뮤지컬이 아니라, 지역 곳곳에 산재한 극단과 극장들”이라는 것이었다.

정년을 마치고 3년 뒤 또 미국을 찾은 것은 당시의 취재만으로는 미국 연극의 전모를 살피기가 충분치 않아서였다. 이번에도 역시 20여곳의 지역 극단과 극장을 새롭게 취재했다. 그렇게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종·횡단하고 최근 펴낸 책이 <브로드웨이를 넘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브로드웨이’를 미국 연극의 곁가지로 바라보면서, 가장 중요한 줄기이자 무성한 가지로서 ‘지역 연극’을 조망한다. 일흔이 된 교수가 발품을 팔아가며 600쪽 가까운 책을 낸 이유는 “그것이 한국 연극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국내의 연극 관련 학과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졸업생이 2800명쯤 돼요. 그 아이들이 거의 서울 대학로로 몰려들어요. 대학로는 공급 과잉에 들어선 지 이미 오래죠. 이제 ‘연극의 거리’라는 말조차 무색해요. 그냥 상업지구잖아요. 아까운 젊은이들이 대학로에서 배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심지어 길에서 만난 제자 한 명이 저를 끌어안고 우는데, 아, 선생으로서 참 무력하더라고요.”

대학로에 대한 김 명예교수의 진단은 비관적이다. “애초에 ‘연극의 거리’로 자리매김했던 속성들은 거의 사라졌다. 더 이상 연극 발전에 도움이 안된다”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학들의 연극 관련 학과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 연기, 아니면 연출”인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려면 무대 설치에서부터 의상, 소품, 기획, 운영 등 모든 걸 갖춰야 하는데, 대학에서는 이미 차고 넘치는 연기만 줄곧 가르친다”고 한탄했다.

“대학로 죽었고 학교 교육도 문제”

미국처럼 지역연극 활성화 촉구

원로 연극인의 애정어린 쓴소리


이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김 명예교수가 제안하는 것은 “미국에서 배우자”로 요약된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란 “지역 극단과 극장들”이다. 그는 “한국은 이미 하드웨어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면서 “전국 곳곳에 지자체가 만든 문예회관과 다목적홀이 220여곳이나 있다”고 말했다. 한데 문제는 그 공연장들의 가동률이 낮다는 점. 그는 “프로그램이 빈약해 가동률이 50%가 채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은 “우리도 미국처럼 지역 극장들을 활성화하자”로 모아진다. 그 방향이야말로 지역의 문화예술 수준을 끌어올릴 뿐 아니라 청년 취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거양득 정책’이라는 것이다.

“미국을 다녀보니, 어느 지역에든 그 도시의 얼굴이 되는 극장이 있어요. 이른바 지역 상주극장(Regional or Resident Theater)이 현재 통계로 2000곳이 넘어요. 지역민들과 문화적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극단들도 5000곳 이상이 된 지 오래예요. 미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런 흐름이 활성화됐거든요. 지역 정부가 정책을 제안해 끌고가면서, 기업들이 연극을 위한 지원에 나선 거죠. 미국 기업들은 처음에는 공공도서관, 그다음에는 음악과 발레, 마지막으로 연극 지원에 나서거든요. 역사적으로 그렇게 흘러왔어요. 거기에 돈 많은 개인 기부자들까지 합세하면서 ‘지역 극장 부흥’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물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정책이 가장 중요했죠. 그것을 먼저 세워놓고 그다음에 사회적 기부가 힘을 보탠 거죠. 우리도 할 수 있어요. 다만 안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죠.”

김 명예교수는 미국의 지역 극장들이 수익을 남기지 않는 ‘비영리 극장’인 점도 강조했다.

“정부 지원금과 기업 기부금으로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를 서비스하는 거죠. 만약 티켓 판매로 수익이 남으면 극장 기금으로 100% 저축합니다. 혹여라도 지원과 기부가 줄어들 때를 대비하는 거죠. 이번에 펴낸 <브로드웨이를 넘어>는 아마도 저의 마지막 연구서일 겁니다. 한국에서 연극 선생으로 30년 이상 녹을 먹고 살았는데, 뭐라도 해놓고 싶었어요. 이 책이 정책 입안자들과 기업들에 작은 영감이라도 주길 바라는 거죠. 연극은 계속돼야 하니까요.”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