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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금)

[초동여담]'강변칠우'와 비정규직, 오래된 한(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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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 1613년, 문경 새재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챙긴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화적떼의 소행으로 보였다.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살아남아 범인들을 미행했다. 화적떼가 아니었다. 영의정을 비롯한 고관들의 자제 7명이 저지른 일이었다. 다만 '호형호부(呼兄呼父)'를 할 수 없던 서얼, 이른바 '칠서'였다.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는 양인이거나 노비인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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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얼들의 관직 진출은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명망가에서 태어나 지식을 쌓고 혜안을 키워봤자 쌓이는 것은 한(恨)이었다. 칠서는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신분제를 비롯해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에 직면했으나 성리학은 차별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차별은 곧 무시를 의미한다. 무시는 존재론적인 강한 분노를 낳는다. 칠서는 세상을 원망하며 북한강변에 '무륜당'이라는 집을 짓고 근거지처럼 삼았다. 윤리가 필요없다는 뜻의 이름이다. 술로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강변칠우로 불린다. 도적질로 모은 돈을 기반으로 역모를 꿈꿨다. '더러운 세상, 뒤집어 버리겠다'는 악에 받혔으리라.

물론 세상은 쉽게 뒤집어지지 않는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은 서얼이 아니었음에도 개방적인 사고로 칠서와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 홍길동은 칠서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인물로 읽힌다.

신분을 잘게 나누면 소수의 특권층을 낳는다. 전 정부에서 법원이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에 반대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수면 위는 동일하지만 그 아래에는 물길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40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는 신분의 한이 쌓여간다. '흙수저'라는 조어는 상징적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사장님을 사장님이라 부르지 못하고, 동료를 동료라 부르지 못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설움은 차갑게 굳어간다. '위험의 외주화'는 가장 큰 비극이다.

정부는 유해 작업의 도급 금지 등을 담은 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그 이전에도 관련된 법안이 없지 않았다. 이를 방치하고 있는 국회는 직무유기이자 죽음에 대한 방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법 개정은 기본이다. 본질적으로는 이 지긋지긋한 신분제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방향의 모색이 필요하다. 효율성이라는 낯익은 유령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위험과 차별은 가장 비효율적이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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