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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화려하고 장대한 병풍, 한국인의 일생을 수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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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병풍의 나라’ 특별전 화제

돌잔치·혼인식·장례식의 필수품

수묵 위주의 문인화 전통 깨뜨려

장수 기원한 10폭 ‘군선도’ 압도적

중앙일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자수매화도’. 10폭 병풍의 스케일과 채색화의 매력을 듬뿍 전한다. [사진 APMA]


서울 용산역 앞에 아모레퍼시픽 본사가 거대한 신전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 영국인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설계한 건물이다. 그 지하를 내려가면, 뜻밖에 엄숙하고 성스러운 미술관(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이 펼쳐지는데, 지금 그곳에서 ‘조선, 병풍의 나라’ 전이 열리고 있다.

왜 조선을 ‘병풍의 나라’로 부른 것일까? 동아시아 삼국 모두 병풍을 생활도구로 썼지만 우리는 유난히 병풍을 선호했다. 생애의 첫해를 맞이하는 돌잔치를 병풍 앞에서 벌였고 혼인식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잔치 때에도 반드시 병풍을 펼쳤다. 장례식 때에는 병풍 뒤에 주검을 안치했다. 병풍 앞에서 삶을 시작하고, 병풍 뒤에서 생을 마감했다. 병풍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삶의 중요한 계기마다 등장한 조선의 병풍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고 장대하고 역동적인지, 이 전시가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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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병풍의 나라' 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장.[사진 AP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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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옛 그림에서 간과했던 측면이 있다. 바로 스케일과 채색이다. 우리의 전통미술을 보면, 스케일이 대체로 작다. 하지만 찾아보면 큰 것도 적지 않다. 80여m 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고, 15m에 달하는 괘불도 있었다. 조선시대 그림도 문인화 전통 때문에 간결하고 소박한 것을 선호해 불화나 궁중 장식화처럼 크고 화려한 그림은 주류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최근 채색화를 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수묵화 위주의 문인화 일색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감성을 보여주는 채색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필자는 3년 전 『한국의 채색화』라는 도록을 기획하며 전통 채색화의 가치가 재평가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궁중회화, 민화, 자수처럼 크고 화려한 채색화들을 앞세웠다. ‘스케일과 채색’라는 잣대로 조선시대 병풍 그림의 위엄차고 다채로운 세계를 한껏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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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해상군선도’. 10폭 병풍의 스케일과 채색화의 매력을 듬뿍 전한다. [사진 AP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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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처음 공개된 10폭의 ‘해상군선도’(19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는 스케일과 장식성과 스토리의 삼박자를 갖춘 작품이다. 색색깔의 옷을 입은 신선들이 바다 위를 거뜬하게 걷고 있다. 신선들이 상징하는 장수의 의미를 부각한 그림이다. 이 병풍은 고종이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세운 독일인 칼 아드레아스 볼터(Carl Andreas Wolter, 1858-1916)에게 선물한 것이다. 2013년 6월 독일에서 그의 손녀가 간직한 이 병풍은 우리나라로 돌아온 사연이 있다.

‘자수매화도’(20세기 초,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도 이번 전시에서 탄성을 자아내는 작품 중 하나다. 평양에서 활동했던 양기훈의 매화도를 본으로 삼아 제작한 것인데, 10폭 병풍을 한 화면으로 삼아 시원하게 자리 잡은 매화나무의 위용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평안남도 안주의 남자 자수장이 제작한 안주수(安州繡·안주에서 생산된 자수를 일컫는 말)로, 흔히 보아온 자수와 달리 남성미가 넘친다. 자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깨트리는 데 충분할 만한 스케일이다.

‘십장생도’(19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는 19세기 궁중 채색화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데 손색이 없다. 소나무, 불로초, 해, 구름, 산, 물, 대나무, 사슴, 거북, 학으로 장수의 낙원을 맑고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했다. 평안북도 철산읍을 그린 ‘철산읍지도’(19세기, 개인소장)도 눈여겨볼 작품이다. 기하학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민화풍의 산봉우리와 지도로 나타낸 철산의 전경이 대비를 이룬 지도 형식의 그림이다.

이번 전시를 본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전시 설계와 조명에 대한 찬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전시 디스플레이와 조명은 격조 있고, 전시 작품을 가까이서 잘 살펴볼 수 있게 섬세하게 조율됐다.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전시설명을 듣게 한 앱의 개발도 돋보인다. 전시는 23일에 끝나니, 아직 보지 못한 이들은 조금 서두르길 바란다.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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