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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손인규의 현장에서] ‘갑질’이 뒤흔든 2018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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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세밑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기다. 올 해도 많은 일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개인적으로 올해의 키워드로 ‘갑질’을 꼽고 싶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갑질은 영어(Gapjil)로까지 언급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경이로운 갑질부터 기업 오너들의 막말, 한 언론사 사장 딸의 폭언, 최근에는 패스트푸드점 손님이 아르바이트생 얼굴에 햄버거를 던진 일까지 갑질은 그 유형도, 장소도, 대상도 다양했다.

물론 갑질이 올해 한국 사회에 처음 출현한 건 아니다. 단지 수면 아래 있던 다양한 갑질 행태가 수면 위로 파상적으로 떠올라 공론화됐을 뿐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의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처럼 세상의 숱한 갑질은 그동안 있어도 모른 척 외면받아 왔다. 우리는 비겁하게도 그동안 이런 비윤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들을 눈 감아 왔다. 양진호 동영상에 옆에서 사람이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는데도 모른 척 모니터만 바라봤던 직원들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갑질은 사회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한다. 많은 기업 대표나 오너 갑질이 표면화되는 이유다. 문제는 이런 책임 있는 자리의 사람들이 벌인 갑질은 단순히 한 개인의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갑질은 확장성을 가져 그 사람이 속한 기업이나 단체의 존폐까지 좌지우지하는 파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오너 일가의 갑질이 드러나 회장이 검찰 조사까지 받았고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이름에서 ‘대한’이라는 말을 빼라는 압력을 받을 만큼 사면초가에 빠졌던 한진그룹이 대표적이다. 미스터피자를 소유한 MP그룹은 정우현 회장의 갑질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며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결국 상장폐지 위기까지 몰렸다.

제약업계도 갑질 후폭풍을 비껴가지 못했다. 몇몇 제약기업 오너들의 갑질이 드러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는가 하면 해당 기업의 신뢰가 무너지는 위기도 찾아 왔다.

보수적인 면이 있는 제약업계는 대개 창업주의 뒤를 이어 2세, 3세가 회사 경영을 물려받는 일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한 오너와 그 자손들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높은 위치에 있게 되면서 자칫 갑질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선천적으로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 환경 때문에 때론 비상식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면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제약기업의 오너를 매도하는건 아니다. 기자가 만난 대부분의 제약사 오너들은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았고 품위가 있었다. 대부분 오너들은 그들 회사를 사랑하며 분신처럼 아꼈다.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너 갑질은 직원 등의 대상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인식할 때 표출된다는 게 중론이다. 물려받은 회사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다보니 전문경영인 얘기도 나오는 것이다.

350년 전통의 독일 제약사 ‘머크’와 1885년 설립된 ‘베링거인겔하임’은 가문이 소유한 가족 기업이지만 경영에 있어서는 경영 전문가에게 맡기고 최소한의 참여만 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경영 철학으로 이들 제약사는 300년, 100년 넘는 시간동안 글로벌 제약사로의 위치를 유지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최근 이웅렬 코오롱 회장이 갑작스럽게 퇴임을 선언했다. 코오롱은 코오롱생명과학이라는 제약사를 계열사로 뒀다.

이 회장은 회사 임직원 행사에서 예고없이 나와 “내년부터 그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떠난다”며 “앞으로 그룹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살아왔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꼈다”며 “그동안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한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다 내려놓는다”고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솔직히 놀랐다. 많은 기업 오너나 경영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혀 반대의 길을 선택한 이 회장의 결심이 대단하다”고 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선택이었든 다른 이유였든 이 회장의 퇴진이 제약업계에 또 한국사회에 좋은 자극이 됐으면 한다. 이 회장처럼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얘기가 아니다. 현재 자신의 위치가 맞는지 그 위치에서 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등을 곱씹어보자는 것이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전파된다면 갑질은 한국사회에서 멸종될 것이다.

iks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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