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에서 열린 ‘#미투, 세상을 부수는 말들’ 퍼포먼스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5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송파경찰서는 지난 4월 유명 콘텐트 제작업체 ‘셀레브’ 내의 상습적인 갑질과 성폭력을 폭로했던 김모(31)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김씨는 올해 4월 19일 자신의 페이스북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당시 셀레브 대표 임모씨의 갑질ㆍ성폭력을 폭로했다. 김씨는 “임씨가 직원들에게 일상적으로 욕설ㆍ폭언ㆍ고성을 퍼부었고, 회식에서는 기본 소주 3병을 마시도록 강권했으며, 2차ㆍ3차로는 남녀 직원을 모두 룸살롱에 데려가 여직원까지 여성 접대부를 선택하게 했다”고 폭로했다.
임씨는 폭로 이튿날 “회식을 강요하고 욕설ㆍ고성으로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 게 사실이다.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사과문을 올렸고, 다음날에는 셀레브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임씨는 한달여 뒤인 6월 초에 김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임씨는 고소장에서 김씨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언론을 통해 폭로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며 자신의 사과문 내용을 뒤집었다. 임씨는 김씨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라는 명예훼손 민사소송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을 수사하는 송파경찰서는 김씨를 허위사실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고 있지만, 참고인 진술에 따라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할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올해 3월 미투 운동에 참여했던 저술가 은하선씨도 이달 초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은씨는 경찰 수사에서 과거 성폭력이 사실로 판단되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 여성계에서는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수사를 받는 자체가 2차 피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폭로 내용이 사실이어도 수사기관이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면 폭로자가 처벌을 당할 수 있다”면서 “현행법의 맹점 때문에 미투 운동과 같은 공익적 목적의 폭로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성폭력ㆍ성차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직장 등 조직 내에 숨어있던 ‘갑질’ 문화의 민낯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경우 되레 폭로자가 처벌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운동 초기부터 제기됐다.
법학계에서는 현행법과 기존 판례에서도 공공의 이익이 있는 폭로의 경우에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는 점 등을 고려해,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의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선진국 중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나라는 독일ㆍ일본ㆍ프랑스 등이다. 다른 나라들은 매우 엄격한 조건을 적용해 공익 목적 폭로자를 보호한다. 유엔도 ‘진실 방어’를 위해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김현수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연합뉴스를 통해 “우리나라가 이례적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이유는 유교 사상으로 인해 문화적으로 ‘명예’라는 것을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김 교수는 “미투 운동 등 폭로가 있을 때 이 조항으로 인해 가해자는 도덕적 책임만 지고 실제 처벌은 폭로자가 받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아무도 폭로를 하지 않게 된다”면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은 폐지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신진희 성폭력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는 “사법부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유죄로 볼지언정 벌금형이나 기소유예ㆍ선고유예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참고인들이 진술을 꺼릴수록 폭로자는 폭로 내용이 사실임을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커져 고통을 받는다”고 연합뉴스를 통해 말했다.
오늘(25일)은 유엔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다.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 이슈를 쉽게 정리해주는 '썰리'
ⓒ중앙일보(https://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