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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고재현의세상속물리이야기] ‘유령입자’와 한반도 비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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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 ‘중성미자 검출기’로 核검증 제안 / 순수기초 연구 측정기법이 평화 위한 도구로

세계일보

한국 과학자들이 포함된 6개국 물리학자가 최근 중성미자 검출기를 북한 비핵화 검증에 활용하자는 제안을 저명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발표한 바 있다.

중성미자란 원자로 내 핵분열 과정에서 생성돼 다량으로 방출되는 소립자를 말한다. 즉 북한 영변 원자로 주변에 검출기를 설치해 중성미자를 탐지하면 원자로의 가동 여부와 출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광에 있는 한빛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선 국내 연구진이 설치한 두 대의 검출기가 원자로에서 나오는 중성미자를 탐지하고 있고 이 입자의 성질을 밝히는 데 기여했다.

중성미자는 1930년쯤 방사성 원소의 핵이 붕괴할 때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 듯이 보이던 실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파울리란 물리학자가 도입한 가상의 입자였다. 중성미자는 지금도 정확한 질량을 모를 정도로 매우 가볍고 빛처럼 빠르며 전기적으로는 중성을 띠고 있어서 일반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는다. 이 소립자는 원자로 내 핵분열 과정뿐 아니라 태양과 같은 별 내부의 핵융합 과정, 큰 별의 최후를 장식하는 초신성 폭발에서도 막대한 양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지금도 매초 수백조 개의 중성미자가 우리 몸을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몸을, 그리고 발밑의 지구를 그대로 관통해 빠져나간다. 이런 이유로 중성미자는 ‘유령 입자’라 불렸다.

셀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있으나 이를 탐지할 방법이 마땅치 않던 중성미자는 1956년 이 입자가 풍부하게 만들어지는 미국 서배너강 옆의 핵발전소 옆에서 물리학자들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성미자는 약한 상호작용을 거쳐 물질과 반응하기에 탐지할 확률이 엄청 낮다. 이처럼 희미하게 반응하는 소립자를 검출하는 방법은 대량의 반응 물질을 준비해 놓고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최초로 중성미자를 검출했던 위 실험에선 4200ℓ의 염화카드뮴 수용액이 사용됐지만, 일본 가미오카 광산에서 이뤄진 실험에서는 처음엔 3000t, 나중엔 5만t의 물이 중성미자 검출에 이용됐고 이는 일본에 두 번의 노벨상을 안겨주었다.

이처럼 물질과 반응하기를 꺼리는 중성미자의 특성은 어떤 면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 만큼 중성미자가 만들어진 곳의 정보를 그대로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일반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측하면 표면의 광구와 그 주변만을 보게 되지만 태양의 핵에서 만들어진 중성미자를 탐지하면 태양의 내부 구조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즉 미시 세계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데 이용되던 중성미자라는 창문이 별의 내부나 초신성 폭발의 순간을 상세히 들여다보는 새 방식으로 망원경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동안 중성미자의 중요한 비밀이 벗겨질 때마다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졌듯이 이 소립자는 현대물리학의 핵심 연구 주제 중 하나였다. 순수 기초 연구에 활용된 측정 기법을 평화적 핵 감시에 이용하자는 과학자들의 이번 주장은 참신하게 다가온다. 특히 한빛원자력발전소 주변에 설치된 검출 장비가 국내 기술로 구축된 만큼 이번 제안은 남북 공동연구의 맹아도 품고 있다. 미국의 한 원자로 근처에서 처음으로 중성미자의 얼굴을 드러냈던 검출 기술이 이제 북한의 원자로 옆에서 평화의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고재현 한림대 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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