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의 비극은 결국 현재의 비극으로 끝났다.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은 천신만고 끝에 진범이 잡혀 법의 심판을 받는가 했지만, 지난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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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가 지나 국내에서 처벌하지 못한 20년 전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사건’ 주범이 스리랑카 현지에서 다시 법정에 서게 됐다. 하지만 부실한 초동수사로 인해 강간 혐의는 인정되지 못하고 처벌 수위가 낮은 성추행 혐의가 적용됐다.
16일 법무부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1998년 대구 구마고속도로에서 트럭에 치여 숨진 대학생 정모양(당시 18세)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스리랑카인 ㄱ씨(51)가 지난 12일 스리랑카 검찰에 의해 스리랑카 콜롬보 고등법원에 기소됐다. 현지 법상 20년인 공소시효 만료를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1998년 10월17일 새벽 대학축제를 마치고 술에 취해 귀가하던 정양은 집에서 7㎞ 떨어진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대형트럭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검찰은 단순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다. 유족들은 수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했고 사고현장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정양의 속옷을 찾아내기도 했다. 5개월 뒤 재조사를 통해 속옷에서 신원불상 남성의 정액이 검출됐지만 추가 단서가 없어 수사는 진척되지 않았다.
13년 후인 2011년 청소년 성범죄로 붙잡힌 ㄱ씨의 DNA를 감정해보니 정양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수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검찰은 정양이 ㄱ씨를 포함한 스리랑카인 3명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고속도로 가드레일을 넘어 도망치다 트럭에 치인 것으로 결론 내리고 사건 발생 15년 만인 2013년 9월 ㄱ씨를 구속기소했다. 나머지 2명은 불법체류로 이미 추방된 상태였다.
당시 공소시효는 강간죄가 5년, 두 명 이상이 벌인 특수강간죄가 10년으로 모두 끝났다. 고심하던 검찰은 ㄱ씨 등이 정양을 성폭행하고 소지품을 훔쳤다며 공소시효(15년)가 남은 특수강도강간죄를 적용했다.
법원은 ㄱ씨 등의 성폭행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강도 혐의는 증거 부족으로 무죄로 판단했고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에 따라 강간이나 특수강간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게 됐다. ㄱ씨는 스리랑카로 강제추방됐다.
이후 정부는 스리랑카 당국에 사법공조를 요청하고 ㄱ씨가 죗값을 치르게 할 방안을 모색했다. 한국과 형사사법공조 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던 스리랑카에 전담팀을 두 차례 보내 협의하고 1000쪽에 달하는 증거서류 번역본을 전달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스리랑카 당국도 한국을 찾아 유족, 당시 수사관, 부검의 등 33명에 대한 참고인 조사와 현장검증을 했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스리랑카 검사들이 국과수에서 과학수사 교육을 받는 등 사법당국끼리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돼 원활한 협조가 가능했다. 스리랑카로서도 국경 밖에서 발생한 자국민 범죄에 대해 처음으로 수사·기소한 사건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스리랑카 검찰은 ㄱ씨의 DNA가 피해자 몸이 아닌 속옷에서 발견됐고, 부검 등을 통해 강압적 성행위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며 무기징역까지 내려질 수 있는 강간 혐의 대신 성추행 혐의를 적용했다. 스리랑카에서 성추행죄는 중하지 않은 추행, 성희롱 등 성적으로 괴롭히는 행위에 폭넓게 적용되며 법정형이 징역 5년 이하다. 스리랑카 검찰은 공범 2명도 전문진술(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의존한 진술) 외 추가증거가 없어 기소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부실했던 초동수사가 또 다시 죄에 맞는 형벌을 막은 것이다.
정대연·조미덥 기자 ho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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