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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기술탈취 논란 해법-정부 전속고발권·징벌적 손해배상 강화보편적 기술 범위 분야별로 구체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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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중심 국내 산업구조상 중소기업은 지금까지 대기업 하청업체로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종속관계에 있다 보니 공공연하게 기술탈취가 이뤄진다. 대기업 매출 의존도가 높은 일부 중소기업은 부당한 기술자료 요구를 거부하기 쉽지 않다. 정부는 ‘기술탈취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은 이유다. 전문가들은 제도 개선과 함께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오랜 관행을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해법 1 | 처벌 수위 강화

▷유명무실한 전속고발권 살려야

우선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방안은 처벌 강화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있다.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피해자에게 입힌 재산상 손해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토록 한 제도다. 현재 하도급법 등에서 피해액의 3배까지 손해배상액으로 매기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한국은 전반적인 피해 배상 규모가 약한 편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손해배상액 평균액은 6000만원이다. 미국(49억원)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다. 정부는 하도급법, 상생협력법, 특허법, 부정경쟁방지법, 산업기술보호법 등 지식재산권 관련 5개 법률에 손해배상액을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부과하도록 했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아직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하도급법 일부에만 적용된다”며 “특허법은 물론 민법 전반으로 확대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정위 전속고발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봄직하다. 전속고발권은 중소기업 대신 정부에 고발권을 준 제도다. 지금은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 최근 전속고발권 폐지론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소송에 들어간다면 승리하기는 무척 어렵다.

김문겸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는 “대기업이 대형 로펌 등을 활용하면 증거 모을 힘이 없는 중소기업은 재판에서 이길 수 없다”며 “법적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을 위해서라도 전속고발권 제도를 활성화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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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법 2 | 기술자료 임치제도 활성화

▷대기업과 소송 치를 때 유용

‘기술자료 임치제도’를 좀 더 보완해 운영한다면 기술탈취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 기술자료 임치제도란 중소기업이 제3의 기관에 핵심 기술과 영업비밀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제도다. 중소기업이 미리 기술자료를 등록하면 기술 유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이 개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보관된 기술은 법원에서 증거로 쓰일 수 있어 대기업과 기술탈취 소송을 치를 때 유용하다.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는 이 제도를 약 100년 전부터 도입해 기술 보호 수단으로 활용한다.

한국에서 기술자료 임치제도는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임치계약 건수는 2013년 5685건에서 2015년 8562건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2016년과 지난해 9000건대에 머무른다. 올해도 5월 기준으로 체결된 임치계약은 약 2500건에 불과하다.

현재 이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다. 대기업이 일부 출연해 만들어졌다. 대기업과 거래할 때 기술을 임치한 사실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임치제도 운영 주체를 좀 더 공적인 기관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김희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일정한 조건하에 서로 합의해 임치제도를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한다”며 “중소기업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기술 임치제도를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매경이코노미

▶해법 3 | 기술자료 요구는 불법

▷대기업 실무자 교육 병행해야

기술 유출 행위가 법위반이란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기술자료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는 점은 잘 모른다.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만 서면을 통해 제한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국내 대기업은 이런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으나 정착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린다. 기술탈취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도 개편 못지않게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중소기업 지식재산권이나 기술을 뺏는 사례가 많다면 일반적인 기업은 “굳이 우리가 제값을 주고 기술을 사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소위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다.

정태균 BLT 특허법률사무소 변리사는 “제값을 내고 기술을 사도록 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며 “공정거래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기술력 있는 인수합병(M&A)을 활성화하는 실리콘밸리 문화가 정착해야 기술 유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법 4 | 중소기업은 무조건 약자?

▷스스로 보호할 방패 찾아야

중소기업은 ‘약자’라는 울타리 안에만 의존해서는 곤란하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를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과 협력 전에는 사전 법률 검토를 꼼꼼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은 기술과 아이디어로 승부한다. 특허는 기업의 목숨줄과 같지만 중요성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하다.

오성환 변호사는 “무형재산이나 법률 비용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는 중소기업이 많다”며 “하도급 계약 전 전문 변호사를 만나 컨설팅 받고 관련 문구나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써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직원 관리도 중요하다. 비밀 보호를 위한 근로계약서 작성부터 시작해 전직 금지 계약 같은 세부 사항을 꼼꼼히 챙겨야 한다. 김정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관리하지 않은 영업비밀은 법적으로 보상받을 수 없다”며 “출입 제한이나 USB 반출입 금지 등 영업비밀 관리에 대한 투자도 법률자문과 마찬가지로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해법 5 | 여전히 논란인 보편적 기술

▷각종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 필요

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한다고 하자. 통상 양측은 부품 사양을 논의한다. 기술이 복잡할 때는 양측 간 기술협의가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일부 중소기업은 이미 알려진 기술을 마치 자신이 새롭게 생각했던 것처럼 밝히기도 한다. 그 기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기술탈취 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거나 보편적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할지는 계속 논란거리다. 억울한 중소기업이 발생해서는 안 되겠지만 일반적인 기술인데 대기업이 탈취했다고 주장하는 기업도 종종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탈취 문제를 중소기업 혁신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부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술탈취 문제를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보편적 기술’은 굉장히 추상적인 용어다. 명확히 정해진 범위가 없다 보니 해석이 다 다르다. 기업도 입장에 따라 보편적 기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황은정 법무법인 이안 특허전문 변호사는 “보편적 기술 문제는 전반적으로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는 부분”이라며 “기술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각 분야별로 범위를 보다 정교하게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현 변호사는 “보편적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할지에 대한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며 “제도 개편과 함께 시간이 지나며 다양한 판례가 쌓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승태 기자 kangst@mk.co.kr, 나건웅 기자 wasabi@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78호 (2018.10.10~10.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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