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한국 중산층 가족의 정신적 퇴행…정이현 소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신작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출간

연합뉴스

소설가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상엽]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대도시의 한 중산층 동네에서 학교폭력 사건이 벌어진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회의를 앞두고 가해 학생 측은 관용과 선처를, 피해 학생 측은 가해자 엄벌을 탄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표시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달콤한 나의 도시', '낭만적 사랑과 사회' 등으로 유명한 정이현(46) 작가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으로 펴낸 신작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는 이런 도덕적 갈등 상황을 제시하며 어떻게든 선택을 유예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도시 중산층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그려 보인다.

소설은 조성된 지 30년 가까이 된 1기 신도시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세영'과, 멀리 떨어져 살지만 아파트 재건축에는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남편 '무원', 중학생인 딸 '도우'의 시선에서 각각 이야기를 펼친다.

이 공간은 "도심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지방의 소읍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단지 안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런 곳에서 약국을 하며 동네 사람들과 수없이 마주치는 세영은 알고 싶지 않아도 동네 사람들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학폭위 가해 학생들은 딸 도우와 초등학교 때 여러 차례 같은 반이었다. 덕분에 세영은 그 부모들과 친근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잘 아는 사이다. 반면, 피해 학생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모 없이 조부모와 함께 사는 아이다. 게다가 그 조부모 중 할머니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색깔로 통일해 입는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할아버지는 몸에 큰 문신을 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올랐다. 이 할아버지는 자기 손자가 학교폭력을 당한 뒤 학부모회 부회장인 세영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수차례 보내 가해자를 엄벌해달라고 호소했다.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세영은 결국 상황을 회피하는 선택을 한다.

연합뉴스


[현대문학 제공]



세영의 남편 무원 역시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맞아 번민에 빠진 상태다. 그는 역사학을 공부하고 대학 강사를 하다 돌연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바닷가 호텔을 경영하겠다고 진로를 바꿨다. 가족을 떠나 호텔에서 머물던 그는 어쩌다 자영업자들이 만든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빠져들었다. 이 게시판에 처음 글을 쓰며 프로필 사진으로 여자 사진을 올렸다가 한 남자 회원으로부터 특별한 호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실을 바로잡지 않은 채 활동을 이어왔고, 그 결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는 학교폭력 사건이 파국에 이르고, 세영이 그 상황에서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런 엄마를 일깨우는 딸의 말에 세영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마지막 문장은 퍽 의미심장하다.

"세영은 움직이지 못한다. 간신히 지금은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 짐작보다 더 빨리. 등 뒤에서 적막한 저녁의 구름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학평론가 이소연은 "당장 값을 치르지 않고 연체한 책무들, 미루고 미루다가 암 덩어리가 된 도덕적 태만이야말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병증임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해설했다. 또 "(정이현은) 한국 사회 중산층 가족이 빠져든 정신적 퇴행의 국면을 점묘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안전지대에 자리 잡은 듯 보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위태로운 일상은 우리 사회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허약한 정신적인 기반을 투명하게 노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작가는 책 말미에 "맹목과 불안 사이를 서성이는 사람에 대해, 일상의 어떤 모습에 대해 쓰려 했다는 것을 완성한 후에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

mina@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