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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황정미 칼럼] 식량안보, 요원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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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 관심에 그친 해외 식량 기지 확보 정책…“자국민 해외 농산물에 고관세 물리는 나라”

오랜만에 본 지평선이었다. 황톳빛 대지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졌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는 우기를 앞두고 벼, 콩, 참깨 등을 심기 위해 개간한 땅이다. 1000헥타르(약 300만평)에 달하는 돌나라 한농복구회(이하 한농)의 오아시스 농장으로 브라질 동북부 바이아주에 있다. 브라질은 ‘세계의 곡물창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식량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유기농산물 생산에 천착해온 한농이 브라질에 대규모 농장을 시작한 것도 화학 비료 등에 오염되지 않은 땅이 많아서다. 농산물 생산을 총괄하는 이만응(71) 책임제는 “소출보다는 먹거리 질을 더 따지는데 이곳 기후, 토질이 유기농 짓기에 최적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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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동북부 바이아주에 위치한 돌나라 한농복구회의 오아시스 농장 전경. 약 300만평으로 벼, 콩, 참깨, 만디오까(브라질 뿌리식물), 훼이종(동부콩)을 심기 위해 개간한 땅이다.


이들이 브라질에 진출한 2009년부터 농산물을 거둬들인 건 아니다. 국내서 가져간 토종 씨앗이 현지 기후, 땅에 적응하는 과정에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백 헥타르로 시작한 경작이 1000헥타르 규모로 성공한 건 지난해부터다. 한농이 농지용으로 매입한 1만2000헥타르의 10%에도 못미친다. 주정부 허가가 늦어져 단계적으로 경작지를 넓히는 중이라고 한다. 브라질산 씨앗을 심으면 바로 수확이 가능한데 국내 토종을 고집하는 건 농산물을 현지 유통, 판매하는 것보다 국내 반입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식량 기지 역할을 하겠다는 게 이들의 원대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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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토종단지를 총괄하는 서금석 책임제가 한국 토종 씨앗으로 키우는 작물을 둘러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토종 작물이 적응기를 거치면 씨앗을 채종해 마을과 다른 농장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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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참깨 수확량이 늘어나면서 출하 시기를 조절하기 위해 최근 완공한 대형 저장 창고.


식량 안보 차원에서 해외 식량 자원 확보 필요성이 대두된 건 1970년대 일이다. 곡물 시장이 요동칠 때마다 구호처럼 등장했다가 가격이 안정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애그플레이션(agriculture+inflation, 곡물가 폭등 현상)으로 식량 파동이 일었던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해외 식량 기지 확대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반짝 관심에 그쳤다. 2012년에야 해외 농업개발 지원을 위한 법이 제정됐다. 주식인 쌀이 남아도니 국민은 물론 공무원들의 ‘식량 안보 체감 지수’가 확 떨어지는 탓이다. 쌀 생산량이 넉넉한 건 ‘농심’을 의식해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 파고를 막아주고 수매를 통해 적정 가격을 보장해준 덕이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50.9%다. 정부 보호 정책으로 자급률 100%를 넘는 쌀을 제외하면 국민이 즐겨 먹는 밀(자급률 1.8%), 콩(24.6%), 옥수수(3.7%) 등 대부분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꼴찌다. 그런데도 정부는 올해 초 식량자급률 목표를 55.4%로 기존 목표치(60%)보다 낮췄다. 우리 국민 1인당 농지면적은 약 100평, 그나마 해마다 줄고 있다. 섬나라 일본, 대만 처지와 비슷하다. 두 나라가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정책이 해외로 ‘자국 식량 영토’를 넓히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 1인당 해외농지는 1400평, 대만은 200평으로 우리(20평)와 비교된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속에 농협과 종합상사, 민간 단체들이 협력해 안정적인 해외 농지 확보에 성공한 결과다. 핵심은 무관세다. 자국 자본, 인력, 기술로 일군 해외 농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국내 들여올 경우 관세를 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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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브라질 현지법인 대표가 한농의 현지 유기농 인증사업과 농장 운영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 대표는 “원래 브라질 진출 취지가 한국 식량 위기 해소의 전진기지로서 ‘대한민국 지키기’ 프로젝트인데 고율 관세로 어려움이 많다”면서 “이 곳에 먼저 진출한 일본 국민들은 무관세 정책 덕분에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했다.


브라질 진출 8년 만에 콩, 참깨 풍작을 이룬 한농은 지난해 국내로 수출하려고 수확물을 포장했다가 결국 포기했다. 높은 관세(콩 487%, 참깨 630%) 벽에 부딪혀서다. “국내 자체 생산이 턱없이 부족한 작물에도 고관세를 매기는 한 현지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국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식량 기지 역할은 어렵습니다.” 신영주 브라질 현지법인 대표의 말이다. 해외농업 개척 선구자인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 연구소장은 우리나라를 미국 등 주요 곡물수출국과 카길과 같은 다국적 곡물메이저의 ‘식량 식민지’라고 했다. “미국 등 눈치를 보느라 자국민들이 개척한 해외농지 곡물에 관세를 물리는 유일한 나라”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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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 편집인


50%대의 정부 식량 자급률 목표치는 우리 곡물시장을 계속 해외 국가·기업에 맡기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잦은 기상 이변은 식량 불안을 키운다. 기후 변화가 일상이 되고 전 세계적으로 경작지는 줄어드는데 ‘식량 안보’에 대한 정부의 고민이 없다. “수십년 미래를 내다보고 정책을 펴는 일본이 부럽습니다.” 해외 농업 개발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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