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헌 정치부장 |
“대통령이 차를 타는데 흰색 야구 모자를 썼다. 차량 뒤에는 골프백이 실려 있다. (중략) 대통령 차량은 버지니아주 스털링에 있는 ‘트럼프 내셔널 골프 클럽’에 도착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5시간 반이나 만나고 서울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를 설명한 직후인 7일 오후 11시 10분. 폼페이오에게 김정은 메시지를 보고받았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응이 궁금해서 백악관이 보낸 풀(pool·기자단의 취재 공유 시스템) e메일을 열었더니 트럼프는 골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해 참모를 평양에 보내놓고 자신은 태연하게 일요일 아침(현지 시간은 7일 오전 10시 10분)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던 것. 트럼프에게 비판적인 미 언론들도 트럼프 휴일 골프는 일상이어서 별문제 삼지 않는다. 이날도 그랬다.
트럼프의 골프장 나들이가 떠오른 건 문재인 대통령 휴식과는 유독 대조적이어서다. 워싱턴만큼 가을볕이 좋은, 같은 일요일이었지만 문 대통령은 7일 폼페이오 접견 때문에 청와대 밖을 거의 나가지 못했다. 좋아하는 등산도 그림의 떡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최근 경남 양산 자택에서 찍은 사진은 ‘한국 대통령 휴식의 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추석 연휴를 뉴욕에서 보낸 뒤 양산 자택 인근 저수지에서 우산을 쓴 채 양말도 안 신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양산으로 떠나기 전 뒤늦은 연휴를 참모들이 언론에 공개했다고 하자 표정이 밝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집에서조차 마음대로 못 쉬는 처지가 스스로도 답답했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이 사진과 함께 제대로 된 대통령 휴식시설이 없다고 보도하자 엄청난 댓글이 쏟아졌다. 찬반은 날카롭게 갈렸다. 반론은 “하는 게 뭐라고 별도의 휴식시설이 필요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사실 대통령 휴식시설은 전용기 도입 문제와 함께 정권과 상관없이 늘 뜨거운 감자였다. 논의만 하려고 해도 “일이나 열심히 해라”는 야당의 공세가 쏟아지고 이를 뚫을 창은 마땅치 않았다. 왜 그럴까. 주 52시간 근무제도를 도입하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외쳐도 공직문화는 ‘양질의 휴식’을 거론하는 것 자체를 여전히 금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미생활도 몰래 해야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끔 참모들과 골프라도 치려면 ‘거사일’을 정해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테니스를 쳐도 청와대 밖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헬스트레이너를 고용해 경내에서 체조를 했다.
문 대통령도 상황은 비슷하다.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다녀온 ‘산악인’이 개와 고양이 집사 노릇을 하거나 참모들과 관저에서 ‘술 번개’하는 게 여가 활동의 대부분이다. 그나마 건강을 고려해 좋아하는 소주 대신 그리 즐기지 않는 와인 한두 잔 정도라고 한다.
정치문화가 우리와 같지는 않지만 역대 미 대통령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쉬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휴가 중이던 2014년 8월 이슬람국가(IS) 세력들이 미국인 기자를 참수했을 때도 골프장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성명을 내고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에 가서 픽업트럭을 몰고 목장 일을 했다.
이 칼럼이 나가면 또 많은 사람이 “경제가 엉망인데 무슨 쉴 궁리냐”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 11위 경제대국의 국정을 이끄는 대통령의 휴식은 효율적이고 전략적이어야 한다. 대충 쉬는 건 미덕이 아니다. 대통령의 컨디션은 국정 리스크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격에 맞는 대통령 휴식 시스템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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