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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삶의 향기] 닉슨 인 차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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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되어 버린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한반도에도 평화의 오페라가 울려 퍼지기를

중앙일보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예술도 사람의 일이니 정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야 없겠지만, 유독 오페라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히 더 정치적이다. 태생적으로 부와 탁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궁정의 오락이라 그럴까. 오페라는 국가 간 문화적 우월함을 견주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권력자의 힘을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오페라가 제공하는 감정적 경험이 워낙 커서 정치적 효용가치도 높다. 잘 짜진 드라마와 정교한 음악에 곁들여 춤, 의상, 무대의 화려한 볼거리까지. 오페라만큼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예술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페라의 단골 소재는 신화와 역사다. 공동체의 긍지와 동질감을 끌어내는데 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신화와 역사의 주인공들을 소환해서 오페라 특유의 상징과 신비로움을 더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성공 공식이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초연된 ‘닉슨 인 차이나’는 새롭고 파격적이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마치 TV 뉴스를 보는 것 같은 방식으로 오페라 무대에 올렸으니 말이다, 비평가들로부터 “CNN 오페라”라는 비난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신선하다는 평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1972년 2월 21일 베이징. 닉슨 부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비행기에서 내려온다. 저우언라이 수상이 공항에 나와 이들을 영접하고 악수를 한다. 무대에는 환영 나온 중국 군인들로 가득하다. 다음 장면은 마오쩌둥과 닉슨 간의 정상회담. 마오가 철학적 경구를 섞어가며 현학적인 농담을 던지자 닉슨은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회담의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정상회담의 긴장은 다행히 환영만찬에서 누그러진다. 닉슨이 서로의 화합을 도모하자는 연설을 하고 양측이 평화에 대한 소원을 담아 건배한다.

오페라에는 닉슨의 부인 팻도 등장한다. 그녀는 베이징의 병원과 학교, 공장에 가서 중국 인민들을 만나고 중국 황제들이 묻혀 있는 명나라 유적지를 방문한다. 저녁에는 양국 정상 부부가 같이 중국의 혁명 모범극 ‘홍색낭자군’을 관람한다. 학대를 당하던 소작민의 딸이 홍색낭자군의 여군이 됨으로써 지옥 같은 굴레에서 해방된다는 전형적인 공산주의 체제 선전극이다. 팻 닉슨과 마오의 부인 장칭은 모두 소프라노이면서도 완전히 서로 다른 음색으로 무대를 지배한다. 팻이 부드럽고 푸근하다면 장칭은 날카로운 콜로라투라다.

오페라는 등장인물들의 남모를 고뇌도 다룬다. 닉슨 부부와 마오쩌둥 부부, 그리고 저우언라이와 키신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난 이들은 불안하기도 하다. 첫 장면에서 닉슨은 “아폴로호에서 달에 처음 발을 딛는 기분”이라는 말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우려라고 해야 할까. 이들의 내면적 갈등은 그래서 유난히 음산하고 거친 음악으로 표현된다.

요즘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장면이 아닌가. 올 2월 북한의 특사가 온 것을 시작으로, 사상 초유의 역사적 방문과 답방이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으니. 서로를 맹비난하던 미국 대통령과 북한 지도자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과시할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 대통령이 평양을 가더니 이제는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에 온다고 한다. ‘닉슨 인 차이나’를 능가할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닉슨의 중국 방문이 냉전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도화선이 되었다면, 그의 서울 방문은 마지막 남은 냉전시대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사건이 될 테니까.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그 자체가 예술이 되기도 한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 회담이 그렇고,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정상회담이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연설은 그 어떤 아리아보다 강렬하게 한민족의 뿌리와 긍지를 고양했고. 아마도 그 피날레는 ‘김정은 인 서울’이 되지 않을까. 강한 기대만큼 불안감도 크다. 그래도 한 걸음 내딛는 수밖에. 이 세상엔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도 없는 법이니까.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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