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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매경춘추] 서울에서 베를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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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오케스트라의 한 해 사업 중 하이라이트가 있다면 외국 순회 공연을 꼽을 수 있다. 보통 대륙별로 유럽, 미주, 아시아·태평양 권역으로 나누어 해당 지역 내 다수 도시들을 돌면서 이루어진다. 예술적으로는 물론 행정적·재정적으로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만큼 지역 및 공연장 선택 문제를 포함해 순회 공연 준비는 수년 전부터 진행된다. 외국 순회 공연은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보여주고 담금질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집약적으로 연주단체의 에너지를 고양시켜 줄 뿐 아니라 평화 사절단으로서 소속 도시 위상 제고, 나아가 국위 선양 기능까지 기대할 수 있는 대형 문화외교 프로젝트다.

다음달 말로 예정된 유럽 순회 공연을 앞두고 동시에 향후 순회 공연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 베를린 출장을 다녀오던 중 매체를 통해 서울발 베를린행 기차표를 접하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최근 남북 교류 분위기 속에서 남북 철도 교류와 함께 유라시아 철도 프로젝트가 연일 주목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공연기획자로서 실현시키고 싶은 구상이 떠올랐다. 서울, 나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서 서울에서 평양을 거쳐 베를린까지 평화의 사절로서 유라시아 순회 공연을 떠나는 기획이다. 눈을 감으면, 서울역에서 악기를 기차에 싣고 유라시안 특급열차에 오른 단원 100여 명이 서울, 평양, 베이징, 울란바토르, 모스크바, 바르샤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지구 3분의 1에 달하는 거리를 횡단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거점 도시들에서 올리는 공연은 평화를 위한 절실한 제례가 되며, 출발지인 서울과 최종 목적지인 베를린은 분단을 평화로 승화시킨 음악도시로서 여정의 방점이 된다. 특히 2020년은 한·러 수교 30주년이자 한·러 문화 교류의 해로, 분단 체제가 지속되면서 한국인들 머릿속 지도에서 사라졌던 접경 국가, 문화예술의 보고 러시아가 새로 자리매김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길 위의 오케스트라'가 음악만큼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노정에서 일어나는 다사다난한 해프닝들은 상상을 초월하며,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업무량으로 직원들 중에는 순회 공연이라면 설레발을 치는 경우도 있다. 역설적인 것은 공연 후 낯선 벽안의 관객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관계자들은 전율과 함께 다사다난했던 과정에서 겪은 노고를 위로받는다는 것이다. 사실 지구상에 오케스트라만큼 신비로운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 또 있을까. 국적, 언어, 성별, 연령대가 서로 다른 단원 100여 명이 각기 다른 악기 100여 대로 하나의 지휘봉 아래 하나의 하모니를 이뤄내는 매일매일의 기적을 목도하고 있다면, 그 어떤 꿈을 꾸지 못하겠는가.

[강은경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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