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자리 정규직화 밀어붙여
기업들 비정규직 채용문도 잠궈
“시장 탄력성 높이는 노동정책 필요”
정부는 지난해 10월 ‘일자리 정책 로드맵’을 발표했다. 고용을 늘리고, 소득도 높이겠다는 게 골격이다.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81만 개 늘리고, 민간부문의 비정규직 남용을 방지하고 근로여건을 개선하는 방안 등을 담았다. 사실상 모든 일자리의 정규직화에 방점을 뒀다. 이른바 ‘정규직은 선(善)이고, 비정규직은 악(惡)’이라는 프레임이다.
파리바게뜨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 협력업체 직원을 본사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는 고용노동부의 명령이 내려갔다. 무리한 법 해석 논란이 있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수만 명이 정규직이 됐다. 고용은 안정됐지만 일자리가 늘어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기업은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 채용문마저 걸어 잠갔다. 제조업 취업자가 12만7000명 감소했다. 모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기업의 채용 자율성과 절차가 무시되고 느닷없이 정부발 인력폭탄이 쏟아지는 상황에선 신규채용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공부문도 마찬가지다. 예산에 맞춰 운영되는 공공부문의 특성상 고용 창출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식이었다. 고용 형태를 바꾸는 것일 뿐 일자리를 새로 만드는 건 아니었다.
시장과 동떨어진 이념형 정책 편식도 문제다. 예컨대 최저임금이 왜 시급 1만원이 돼야 하는지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되뇔 뿐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고용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문제 제기가 학계와 경영계, 심지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며 버텼다. 그것도 유리한 통계자료만 짜깁기했다는 논란을 자초하면서다.
그러는 동안 사업시설관리·임대서비스업(-10만1000명)과 교육서비스업(-7만8000명) 등 최저임금의 영향을 직접 받는 업종에서 일자리가 사라졌다. 음식점업 폐업신고는 16만6571건에 달하는 등 자영업자 폐업률은 90%에 이른다. 이런 업종에는 주로 저소득층이 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득주도 성장론이 취약계층의 돈 벌 구멍을 틀어막은 셈이다.
정부는 근로시간 단축으로 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5일제가 시행된 이후 연간 근로시간은 10.3% 줄었지만 고용률은 0.6%포인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현대차는 2013년 심야근로를 없앴지만 고용은 늘지 않았다.
산업현장의 불문율인 노사자율원칙도 무시했다. 근로자가 더 일하겠다고 해도 주52시간을 넘기면 처벌하는 방식으로다. 미국에선 지난해 정규직 근로자 가운데 50시간 이상 일한 사람이 49%였다. 이 가운데 60시간 넘게 일한 근로자는 22%, 70시간 이상도 9%에 달했다. 그런데도 연간 근로시간은 우리보다 적다.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어서다. 한데 우리 정부는 유연근로제에 대해 “근로시간 단축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며 부정적이다. 덩달아 유연한 노동시장을 만들기 위한 노동개혁은 금기어가 된 지 오래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약이나 이념 대신 시장변화에 대한 적응 탄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동정책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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