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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월)

[신장섭의 기업과 경제] 實事求是하려면 카멜레온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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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정부가 은산분리 완화 방침을 밝힌 것에 대해 참여연대와 민주노총 등이 '친재벌 정책'이라고 비판하자, 한 청와대 관계자가 "중요한 것은 무슨 원칙이나 주의가 아니라 국민 삶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린다는 실사구시 정신"이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정책 담당자의 입에서 '실사구시'라는 말이 나온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경제정책에는 이념이 지나치게 강하게 채색되어 경제활동의 실질적 필요와 괴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사구시를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을 실학의 태두로 칭송하고 있지만, 당대에 그의 사상은 이념의 벽에 꽉 막혀 실천할 곳을 거의 찾지 못했다. 조야가 사색당파로 나뉘어 이념 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정책을 조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편에서는 '우클릭'한다고 비판하고 다른 편에서는 '좌회전 깜빡이에 우회전'이라며 좌회전 깜빡이를 꺼야 한다고 비판한다. 정치인과 언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논리로, 진영의 논리로 사물을 파악하고 거기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정약용은 진영의 잣대가 아니라 '쓸모의 잣대'에 따라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실사구시라고 갈파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일이고 알찬 열매를 맺게 한다고 말한다. 이념의 잣대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념에 '바른 것'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것을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과 판이하게 다른 사고방식이다.

실제로 현실은 진영 논리와 많이 다르게 흘러간다. 비정규직 문제를 보자.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벌어지기 전까지 한국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문제 자체가 없었다. 다 정규직이었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이 자금 지원 조건으로 '노동유연성'을 요구했고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정리해고를 적극 시행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시작됐다.

진영 논리에 빠진 사람들은 재벌이 '우파'이고 따라서 노동유연성을 밀어붙인다고 도식적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IMF 체제에서 정리해고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었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한국에 사회복지 제도가 별로 발달되지 않아서 정리해고가 즉각 사회 불안으로 나타난다며 "기업이 인력을 정리할 필요가 있더라도 경기가 좋을 때에 사람을 내보내야지 경기가 안 좋을 때 내보내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까지 말했다.

반면 '좌파'로 분류되는 노조 지도자들은 정리해고를 받아들였다. 노동자들의 실질적 필요를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DJ를 도와줘야 한다"는 진영적 고려 때문이었다. 이념의 잣대로 보면 '극우' IMF 프로그램에 '좌파' 지도자들이 동의하는 역설이 벌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쓸모의 잣대로 보면 '바른 것'이라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경제정책에 어떻게 실사구시를 실천하는가. 진영 논리나 이념에 따르는 비판을 극복하고 경제정책의 쓸모만 바라봐야 한다. 그 쓸모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도자들은 카멜레온이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실제로 성공한 지도자들은 카멜레온적 변신을 서슴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민중행동당'이라는 좌파 정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되며 생존의 문제가 걸리니까 다국적 기업을 적극 끌어들이는 우파정책으로 경제 기적을 일궜다. 덩샤오핑도 '흑묘백묘론(黑描白描論)'으로 중국 경제 대약진의 토대를 닦았다. 우파로 분류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첫 번째로 시행한 경제정책은 은행 국유화라는 좌파 정책이었다.

지도자들이 변신하는 것에 대해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왜 줏대 없이 색깔을 바꾸냐"고 비판한다. 실사구시하는 지도자라면 "필요에 따라 색깔을 바꾸든지, 그게 안 되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소신 있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은 사색당쟁으로 국력을 탕진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던 시절로 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장섭 싱가포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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