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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나에게 당신은 단 하나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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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죽음 앞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영혼과 사랑의 흔적들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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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83살 독일인 한스의 손마디는 내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큼 두껍다. 노동의 흔적이 손마디에 남았다. 6개월 만에 다시 만난 그 손은 더 커 보였다. 파바로티를 닮았던 몸이 반으로 줄어든 탓이다. 껴안으니 등뼈가 만져졌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한스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이 전자우편을 받자마자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는 내 시아버지이기 전에 친구다.

“신이 데려간다면 불만은 없어. 그런데 꼭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걸까?” 통증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던 한스가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물었다. “샤이세, 샤이세, 한국말로 ‘샤이세’를 뭐라고 해?” “젠장.” 한스가 따라 했다. “젠장, 젠장.”

“샤이세, 샤이세”

한스의 고향은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가 된 동프로이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피란 왔다. 그가 8살 때였다. 걷다 화물차에 실려가다 하며 6개월 만에 북해에 이르렀다. 폭격기가 뜨면 숲으로 도망쳤다. 한스는 평생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비행기가 나오는 방송도 보지 못했다. 그때 공포가 되살아나서다. 피란민 수용소와 농가를 전전하다 군인들이 두고 떠난 합판 숙소에서 지냈다. 그때 배를 하도 곯아 지금도 창고에 잼이며 통조림을 천장까지 쌓아놓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온 그는 허허벌판에 집을 지었다. 두 아들은 시멘트 바닥을 기어다니다 무릎이 까지곤 했다. 한스는 그 집을 45년에 걸쳐 짓고 보수했다. 집은 자라는 만큼 늙어갔다. 한 번도 풍족하지 않았다. 한스는 그 큰 손으로 마당에 수영장이라고 우기는 욕조를 만들었고, 사춘기 아들의 파마머리를 직접 말아줬다.

기차 검표원을 하다 화학공장 경리로 정년퇴직했지만, 그는 자신이 목수라 생각한다. 고양이가 낚아채지 못하는 새집을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ㄱ자 모양인 이 나무 집에서 봄이면 뱁새들이 알을 낳았고, 새끼들이 자라면 떠났다.

한스는 곰 인형도 만들었다. 본을 뜨고, 털을 고르고, 재단하고 솜을 넣었다. 목과 어깨, 두 다리와 엉덩이를 연결하는 관절은 따로 박았다. 사지가 움직이는 한스의 곰이 완성되는 데는 두 달이 걸렸다. 곰에게 이름을 붙여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줬다. 40년이 지나 이제는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목이 삐딱해진 ‘대디’는 그가 아들에게 준 곰이다. ‘대디’는 귀퉁이가 나달나달해진 쪽지와 함께 있다. “내 이름을 들으면 딱 알겠죠. 저는 아버지가 만들었어요. 대단하죠? 나중에 아버지가 더 이상 곁에 있어줄 수 없는 날이 올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아버지 대신 이 ‘대디’가 곁에 있어줄 거니까요. 기억해요. 대디를 사랑으로 대해주세요. 왜냐하면 대디는 큰 사랑으로 만들어진 인형이거든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처음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다. ‘근원자’를 위해 장기 적출을 당하다 죽는 이 클론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가? 왜 도망치지 않는가? 다시 읽어보니, 어쩌면 이 소설은 클론이 아니라 우리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죽음의 시기엔 저항할 수 있지만,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안다. 1차 기증에 살아남으면 2차 기증, 또 살아남으면 3차 기증, 그렇게 루스, 토미, 캐시의 몸은 사라질 운명이다. 한스의 몸, 내 몸도 그렇다.

클론도, 한스도, 나도 사라질 운명

클론도 더 살길 원한다. 영혼이 있다는 걸, 인간이란 걸 증명하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돈다. 토미와 캐시는 이 소문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영혼을 증명하는 방법은? 예술이다. 토미는 표면이 고무, 강철 따위로 만들어진 상상의 동물을 그린다. 인간임을 증명할 방법은? 사랑이다. 토미와 캐시는 이 두 증거로 그들만의 시간, 집행유예 3년을 받아보려 한다. 그런데 모두 뜬소문이었다. 토미는 진흙탕 길을 걸으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캐시는 그를 안는다. “마치 그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것이 우리가 어둠 속으로 휩쓸려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듯.”

토미는 4차 기증을 마치고 죽는다. 홀로 남은 캐시는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루스를 잃었고 이어 토미를 잃었지만 그들에 대한 나의 기억만큼은 잃지 않았다.” 나뭇가지, 깨진 플라스틱, 낡은 가방… 소설 마지막에 캐시는 철망 담장에 각종 잡동사니가 바람에 날려 걸린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이후 잃어버린 모든 것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고, 이 앞에 이렇게 서서 가만히 기다리면 들판을 지나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하나의 얼굴이 조그맣게 떠올라 점점 커져서 이윽고 그것이 토미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리라고, 이윽고 토미가 손을 흔들고, 어쩌면 나를 소리쳐 부를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당신은 단 하나뿐이라네.” 한스는 아프기 전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그는 또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잘 걸었다. 음식점에서 화장실 다녀오다 만난 사람하고도 난데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바람에 아내한테 지청구를 들었다. 아침이면 자전거를 타고 갓 구워낸 빵을 사왔다.

이제 그는 보행보조기구를 붙잡고도 몇 걸음 디디기가 버겁다. 걸어 5분이면 닿을 라인강을 보고 싶다기에 집을 나섰는데 몇 걸음 걷다 내 등에 얼굴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벤치까지 겨우 가 앉은 그의 볼에 석양이 내려앉았다. 우물처럼 움푹해진 눈에 농익은 햇살이 일렁였다. “어, 나왔네!” 지나가던 이웃 노인이 한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모두 잡동사니가 되더라도

한스는 자기 보행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벤츠를 한 대 새로 뽑았잖아.” 이웃 노인이 그 말을 받았다. “새 차에 맞는 새 운전면허도 따야지?” 한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한스가 자주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되뇌고 싶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별이 있지. 정원엔 수많은 꽃이 있지, 슬픔과 기쁨도 매 순간 있지. 하지만 당신, 나에게 당신은 단 하나뿐이라네.”

ㄱ자 모양 새집과, ‘대디’ 인형과 45년 동안 완성하지 못한 집이 모두 잡동사니가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에게 당신은 단 하나뿐”이었던 순간들은 남는다. 그는 자신의 영혼과 사랑을 증명했으니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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