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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상봉의 그날까지 부디…” 초대받지 못한 이산가족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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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안타까운 이산 상봉 탈락, 포기자들

# “오빠, 나 쫓아갈래… 주저앉아 울던

열한살 누이동생 평생 가슴에 맺혀”

야속한 세월 벌써 70년 가까이 흘러

# 이산가족 절반 이상 사망ㆍ대부분 80대 고령

십수만명 중에 100명… 몇년 만에 한번

남북 이벤트성 상봉으론 한 못 풀어
한국일보

여기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이산가족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이들은 하루빨리 상봉 방식이 바뀌어 고향 땅에서 가족을 만나길 염원했다. 그리곤 이미 세상에 없을지도 모를 가족에게 쓴 편지를 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한 고향 땅, 부모형제의 모습을 떠 올리며. 이인범(83ㆍ평북 용천 출신)씨가 7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위원회에서 부모와 형,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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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재(91ㆍ함북 회령)씨는 7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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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자(84ㆍ함남 홍원)씨가 9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위원회에서 함북 청진에 살던 고모와 사촌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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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86ㆍ황해도 운율)씨가 8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사에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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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전유황(81ㆍ황해도 해주)씨가 13일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누이동생 신자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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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난 누이동생이 어머니 신발을 거꾸로 신고, 곡식 한 말을 머리에 이고서는 쫓아오는 거야. 피란길 10리 길을 뒤뚱뒤뚱… 햐아, 걸어서 천리 길 가야 하는데 걔 데리고는 도저히 못 내려가갔어. 그래서 ‘야 신자야, 너는 어리니까 인민군이 들어와도 안 죽여. 오빠 친구 따라 돌아가라우’ 그랬더니 말도 말라. 거저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빠, 나 쫓아갈래’ 하고 우는 거야. 내래 그 장면이 평생 안 잊혀. 이 가슴에 한이 맺혔어.”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전유황(81)씨는 1ㆍ4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월남하던 중 동생 신자(78ㆍ추정)씨와 헤어졌다. 남매의 운명을 가른 찰나의 이별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가슴을 쥐어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누이는 물론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야속한 세월만 흘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이번에도 선정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13일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그는 “하루속히 만나자!”라고 쓴 편지를 가슴에 얹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누이를 떠올렸다.

이 땅에서 평생 피붙이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이 어디 이뿐이랴. 7월 31일 기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총 13만2,603명, 이 중 20차례의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을 만난 이는 2,000여명(가족)에 불과하다. 7만5,741명이 이미 사망했고, 살아 있는 5만6,862명 중 63%는 80세 이상 고령자다. 그들에겐 이제 시간이 없다. 20일 21번째 상봉 행사가 열리면 이산가족 대다수는 또 한 번 극소수만의 재회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켜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이산가족,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이제 가족 만나는 건 포기했다.” 7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위원회에서 만난 이인범(83)씨는 체념한 듯했다. 평안북도 용천군에 두고 온 부모와 형, 누이 둘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TV에서 다른 가족들 상봉하는 거 보면 어머니 형님 누님들 옛날 모습이 떠올라 그립고 또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이산가족찾기 신청은 하지 않았다. “십수만 명 중 100명씩, 그것도 몇 년 만에 한 번 열리는데 그 순서에 내가 들겠나.” 대신 그는 상봉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이용할 게 아니라 자유롭고 인도주의적으로 해야 한다. 판문점 같은 데에다 면회소 만들어 놓고 수시로 연락해서 만나다가 서울이든 평양이든 용천이든 왕래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나.”

‘이벤트성’ 상봉 행사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다른 이산가족들도 비슷했다. 함경북도 청진에 두고 온 고모와 사촌동생 금자(82ㆍ추정)씨를 그리는 홍영자(84)씨는 “가족이라도 왕래가 있어야 정이 쌓이는 법”이라며 “정해진 공간에서 한 번 만나고 헤어지는 건 생색내기일 뿐, 실제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고 했다.
한국일보

박모씨가 부모님께 전하는 편지를 정성스럽게 도화지에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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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범씨는 북에 두고 온 직계 가족이 아마도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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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재씨가 7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함경북도 회령 지역 항공사진을 펼쳐놓고 고향 마을이 있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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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으로 직계가족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엔 얼굴 모르는 친척 상봉보다 고향 방문이 더욱 절실하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김균재(91)씨는 “여권만 있으면 세계 어디든 다니는 시대인데 ‘같은 민족’ ‘우리끼리’라면서 서로 한 발짝도 못 들여놓는 나라가 어딨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큼지막한 회령 지역 항공사진을 펼쳐 부모 형제 다 남겨둔 고향 마을 ‘솔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북 관계가 이대로 더 좋아져서 혹시라도 왕래만 된다면 지팡이 짚고라도 가겠는데… 90 넘은 사람이 지금 어떤 희망을 가지겠나. 살아선 고향 못 갈 것 같아”라고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심경을 털어놓았다.

“나이가 들수록 더 조마조마하죠. 내가 장손인데… 내 생전에 고향에 가서 성묘라도 할 수 있을까요.” 6남매 중 막내인 박모(86)씨는 황해도 운율군에 두고 온 부모와 누님들 모두 돌아가셨을 거라 추정했다. 그는 “부모님이 꿈에 안 나타난 지 오래됐어요. 얼굴이 보이면 막내아들이 더 보고 싶어 할까 봐 그러시는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하던 그는 다음 날 돌연 “사진과 실명을 빼달라”고 요청해 왔다.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자녀들이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봐”라는 이유였다.

박정희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사무국장은 “고령인 1세대 이산가족들은 죽기 전에 고향 부모님 산소에 술 한잔 바치는 게 소원이다. 하루빨리 생사 확인부터 서신 교환, 명절 성묘단 파견 등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상봉 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한국일보

대다수 이산가족이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다. 1985년 이후 한 번에 100여명씩 20번 치러진 상봉 행사로 가족을 만난 경우는 고작 2,000여 명(가족)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는 걸 두고 ‘로또 맞았다’고들 하겠나.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생존 이산가족 모두가 지금의 방식대로 가족을 만나려면 500번 이상의 상봉 행사가 더 열려야 한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균재, 홍영자, 이인범, 전유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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