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안타까운 이산 상봉 탈락, 포기자들
열한살 누이동생 평생 가슴에 맺혀”
야속한 세월 벌써 70년 가까이 흘러
# 이산가족 절반 이상 사망ㆍ대부분 80대 고령
십수만명 중에 100명… 몇년 만에 한번
남북 이벤트성 상봉으론 한 못 풀어
여기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이산가족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이들은 하루빨리 상봉 방식이 바뀌어 고향 땅에서 가족을 만나길 염원했다. 그리곤 이미 세상에 없을지도 모를 가족에게 쓴 편지를 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한 고향 땅, 부모형제의 모습을 떠 올리며. 이인범(83ㆍ평북 용천 출신)씨가 7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위원회에서 부모와 형,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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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재(91ㆍ함북 회령)씨는 7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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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자(84ㆍ함남 홍원)씨가 9일 서울 종로구 이북5도위원회에서 함북 청진에 살던 고모와 사촌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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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86ㆍ황해도 운율)씨가 8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사에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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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황(81ㆍ황해도 해주)씨가 13일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누이동생 신자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들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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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난 누이동생이 어머니 신발을 거꾸로 신고, 곡식 한 말을 머리에 이고서는 쫓아오는 거야. 피란길 10리 길을 뒤뚱뒤뚱… 햐아, 걸어서 천리 길 가야 하는데 걔 데리고는 도저히 못 내려가갔어. 그래서 ‘야 신자야, 너는 어리니까 인민군이 들어와도 안 죽여. 오빠 친구 따라 돌아가라우’ 그랬더니 말도 말라. 거저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빠, 나 쫓아갈래’ 하고 우는 거야. 내래 그 장면이 평생 안 잊혀. 이 가슴에 한이 맺혔어.”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전유황(81)씨는 1ㆍ4후퇴 때 아버지를 따라 월남하던 중 동생 신자(78ㆍ추정)씨와 헤어졌다. 남매의 운명을 가른 찰나의 이별은 67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사무치는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가슴을 쥐어뜯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나. 누이는 물론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야속한 세월만 흘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했지만 이번에도 선정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13일 경기 의왕시 자택에서 그는 “하루속히 만나자!”라고 쓴 편지를 가슴에 얹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누이를 떠올렸다.
이 땅에서 평생 피붙이를 만나지 못하는 아픔이 어디 이뿐이랴. 7월 31일 기준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은 총 13만2,603명, 이 중 20차례의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을 만난 이는 2,000여명(가족)에 불과하다. 7만5,741명이 이미 사망했고, 살아 있는 5만6,862명 중 63%는 80세 이상 고령자다. 그들에겐 이제 시간이 없다. 20일 21번째 상봉 행사가 열리면 이산가족 대다수는 또 한 번 극소수만의 재회를 바라보며 눈물을 삼켜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이산가족,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이벤트성’ 상봉 행사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다른 이산가족들도 비슷했다. 함경북도 청진에 두고 온 고모와 사촌동생 금자(82ㆍ추정)씨를 그리는 홍영자(84)씨는 “가족이라도 왕래가 있어야 정이 쌓이는 법”이라며 “정해진 공간에서 한 번 만나고 헤어지는 건 생색내기일 뿐, 실제 이산가족의 아픔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고 했다.
박모씨가 부모님께 전하는 편지를 정성스럽게 도화지에 적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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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범씨는 북에 두고 온 직계 가족이 아마도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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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균재씨가 7일 서울 서초구 자택에서 함경북도 회령 지역 항공사진을 펼쳐놓고 고향 마을이 있던 위치를 가리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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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으로 직계가족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경우엔 얼굴 모르는 친척 상봉보다 고향 방문이 더욱 절실하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김균재(91)씨는 “여권만 있으면 세계 어디든 다니는 시대인데 ‘같은 민족’ ‘우리끼리’라면서 서로 한 발짝도 못 들여놓는 나라가 어딨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는 큼지막한 회령 지역 항공사진을 펼쳐 부모 형제 다 남겨둔 고향 마을 ‘솔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남북 관계가 이대로 더 좋아져서 혹시라도 왕래만 된다면 지팡이 짚고라도 가겠는데… 90 넘은 사람이 지금 어떤 희망을 가지겠나. 살아선 고향 못 갈 것 같아”라고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심경을 털어놓았다.
“나이가 들수록 더 조마조마하죠. 내가 장손인데… 내 생전에 고향에 가서 성묘라도 할 수 있을까요.” 6남매 중 막내인 박모(86)씨는 황해도 운율군에 두고 온 부모와 누님들 모두 돌아가셨을 거라 추정했다. 그는 “부모님이 꿈에 안 나타난 지 오래됐어요. 얼굴이 보이면 막내아들이 더 보고 싶어 할까 봐 그러시는지…”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하던 그는 다음 날 돌연 “사진과 실명을 빼달라”고 요청해 왔다.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자녀들이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봐”라는 이유였다.
박정희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사무국장은 “고령인 1세대 이산가족들은 죽기 전에 고향 부모님 산소에 술 한잔 바치는 게 소원이다. 하루빨리 생사 확인부터 서신 교환, 명절 성묘단 파견 등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상봉 방식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희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사회학과 3)
대다수 이산가족이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다. 1985년 이후 한 번에 100여명씩 20번 치러진 상봉 행사로 가족을 만난 경우는 고작 2,000여 명(가족)에 불과하다. 오죽하면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는 걸 두고 ‘로또 맞았다’고들 하겠나. 통일부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생존 이산가족 모두가 지금의 방식대로 가족을 만나려면 500번 이상의 상봉 행사가 더 열려야 한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균재, 홍영자, 이인범, 전유황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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