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지법 민사부 재판장 시절 대기업들의 '갑질'에 무거운 손배책임 물려 / "얼굴·성기 그대로 온라인 노출… 피해 회복 불가능해 실형 선고 불가피"
홍익대 회화과의 인체 누드 크로키 수업에서 남성 모델의 나체 사진을 몰래 찍어 유출한 것으로 밝혀진 동료 모델 안모(25·왼쪽 두번째)씨가 지난 5월12일 법원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는 모습. 안씨는 13일 1심에서 징역 10개월 실형이 선고됐다. 연합뉴스 |
“피해자 몰래 성기를 포함한 신체를 촬영해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 회복할 수 없는 인격적 피해를 줬습니다. 피해자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13일 홍익대 인체 누드 크로키 수업에서 남성 모델의 나체 사진을 찍어 유포한 혐의로 기소된 동료 여성 모델에게 징역 10개월 실형이 선고된 가운데 엄중하고 단호한 판결을 내린 여성 판사에 법조계 이목이 쏠린다. 평소 대기업 등 우리 사회 ‘갑’들의 불법행위에 무거운 책임을 물어온 명(名)법관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6단독 이은희(49·여) 부장판사는 이날 몰카 유출범인 모델 안모(25·여)씨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령하며 “남성혐오 사이트에 피해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게 해 심각한 확대 재생산을 일으켰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고립감, 절망감, 우울감 등으로 극심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어 누드모델 직업의 수행이 어려워 보인다”며 “피고인은 게시 다음날 사진을 삭제했지만 이미 여러 사이트에 유포돼 추가 피해가 발생했고 완전한 삭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7차례에 걸쳐 피해자에게 사죄의 편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등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하지만 반성만으로 책임을 다할 수는 없다. 처벌과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비록 안씨가 초범이지만 성기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 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 점이 실형 선고의 결정적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맨다리만 촬영한다든지 해서 피해자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대다수 몰카 사진에 비해 죄질이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재판장인 이 부장판사는 경북 영덕 출신으로 영덕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법대에 재학 중인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23기)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고 1994년 법관으로 임용돼 수원지법, 대구지법 안동지원, 서울가정법원, 서울남부·중앙지법 등에서 판사로 근무했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파견(2006∼2009)을 마치고 부장판사로 승진한 뒤에는 전주·수원·서울중앙지법을 거쳐 지난해 2월부터 서울서부지법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다.
이 부장판사는 서울중앙지법 민사10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17년 1월 STX그룹 소액주주들이 강덕수 전 회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해 주목받았다. 강 전 회장이 분식회계로 회사 실적을 부풀려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 원고들의 주장이었다. 당시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소액주주들이 STX조선 주식을 샀다가 분식회계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주가하락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강 전 회장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2016년 11월에는 가습기살균제 사건 피해자가 제조사 세퓨를 상대로 낸 손배배상 청구소송에서 첫 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시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가습기살균제와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 세퓨의 제조물 책임이 인정된다”며 “세퓨는 사망한 피해자들 부모에게 각 1억원 등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2016년 7월에는 유통기한 만료가 임박한 유제품을 억지로 떠넘기거나 판촉사원 임금 지불 의무를 대리점에 전가해 ‘갑질’ 논란을 불러일으킨 남양유업이 피해를 본 대리점주에게 거액을 손해배상금을 물라는 판결로 우리 사회 ‘을’들의 박수를 받았다. 전 대리점주 A씨가 남양유업을 상대로 낸 손배소 사건 판결문에서 이 부장판사는 “남양유업은 A씨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도 유통기한이 임박했거나 회전율이 낮은 비인기 제품들을 주문 전산시스템에 입력해 대금을 결제하게 했다”며 “거래상의 우월적 지위를 부당하게 남용한 전형적인 불공정거래”라고 질타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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