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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김영랑 시인과 ‘제2의 유관순’ 6인 등 독립운동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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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 제73주년 광복절 포상 ‘여성 26명 대거 포함’

·‘독립군 어머니’ 허은·‘혁명가족 안주인’ 이은숙 여사 등

경향신문

서울 배화여학교 재학시절 독립만세 운동을 재현했다가 붙잡힌 여학생 6명이 98년 만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국가보훈처는 8월 15일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일제 감시 속에서 3·1운동을 재현한 배화여학교 학생 6인과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등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77명을 포상한다고 밝혔다.

포상 대상인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93명(애국장 31, 애족장 62)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8명이다. 여성은 26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3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보훈처는 “지난 4월 포상 심사기준을 개선해 177명 중 65명(36.7%)을 포상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3개월로 되어 있던 최소 수형·옥고기준을 폐지하여 3개월 이하라도 독립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경우 모두 포상토록 했다. 또 독립운동 참여 때문에 퇴학을 당한 경우 학생신분을 감안해 포상한다. 보훈처는 “실형을 받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 내용이 분명하면 포상을 전향적으로 고려했다”고 밝혔다.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만912명,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표창 2887명 등 총 1만5052명(여성 325명)에 이른다.

배화여학교 학생 6명은 3·1운동 1주년을 맞아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1920년 3월 1일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학교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수십 명이 일경에 검거되어 재판(경성지방법원, 1920.4.5)에 회부됐다. 이중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이 포상 대상에 포함됐다.

이들은 치밀한 사전 준비를 거쳐 당일 등교하자마자 학교 기숙사 뒷산과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1년 전 3·1운동을 재현했다.

포상자 6명은 거의 10대 후반의 어린 여학생들로서, 최연소자인 소은명 선생은 16세에 불과했다. 보훈처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시위 재연을 우려하여 서울시내 곳곳에서 철통같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어린 여학생들에 의해 과감하게 결행된 만세시위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에 헌신한 허은 여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여사는 재종조부인 왕산 허위 선생이 1908년 순국한 뒤, 줄곧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던 중 만 6세가 되던 1915년에 일가족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부민단 등 현지 독립운동 단체가 주관하는 국치기념일(8·29)과 개천절 행사 등에 참여해 ‘국치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민족독립의식을 키웠고 16세 때인 1922년 이상룡의 손자인 이병화와 결혼했다.

허 여사는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시댁 어른들의 독립운동을 보필하면서, 서로군정서 회의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의 조석을 조달하고 군정서의 독립군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서간도 무장 독립운동 지원에 헌신했다. 여사의 친정과 시댁 모두 여럿이 서훈된 대표적인 독립운동 명문가로 손꼽힌다.

전남 강진에서 독립만세운동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윤식 선생에게는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그는 김영랑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생은 1919년 3월 25일 고향인 강진군 강진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태극기 등을 제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1930년대 ‘毒을 차고’, ‘가야금’ 등의 시를 발표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했다. 보훈처는 “일제의 갖가지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 김윤식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경향신문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조력하고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한 ‘혁명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1889년 충남 공주에 태어난 이 여사는 1908년 10월 20일 서울 상동예배당에서 우당 이회영과 결혼했다. 1910년 남편 일가족과 함께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도왔다.

이 여사는 1919년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하고 1925년 귀국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남편 이회영은 1932년 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다롄행 기선을 타고 만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옥중 순국했다.

아들 이규창이 1935년 3월 상하이에서 친일파 처단에 성공하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이듬해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받고 복역할 때도 옥바라지를 하며 조국독립의 대의를 간직한 채 꿋꿋이 가시밭길을 걸었다.

황해도 신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곽영선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신천읍에서 만세운동 준비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3년 애국장을 받은 곽림대 선생의 딸로, 부녀가 독립운동에 헌신해 서훈된 흔치 않은 사례이다.

평남 순천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5명의 여성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최복길, 김경신, 김화자, 옥순영, 이관옥 선생 등은 1919년 평남 순천에서 윤찬복 등과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회원들로부터 의무금 등을 징수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밀사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단체의 주모자로 회계를 맡았던 최복길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회원으로 참여해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한 나머지 4명에겐 대통령표창이 각각 추서된다. 보훈처가 발굴한 ‘조선 소요사건 관계서류’(1921년 일본 육군성) 등의 자료에서 공적이 확인됐다.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계석노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평북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한성호 선생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다. 선생은 1920년 3월 평북 의주에서 조직된 천마산대의 소대장으로 그해 4월 평북 구성에서 현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마산대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항일 무장단체로, 화승총과 일경으로부터 노획한 총검으로 무장하고 여러 차례 유격전을 벌여 1920년 이후 남만주의 광복군사령부에 흡수될 때까지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박성진 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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