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지
문학평론가
이기호의 단편소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의 난맥상에 대한 소묘로 주목할 만하다. 교수이자 작가인 ‘나’가 사는 낡은 아파트 단지에 권순찬이 찾아와 농성을 하기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가 그곳 입주민의 아들인 사채업자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그만 이중으로 빚을 갚았으니 절반을 다시 돌려달라는 것이다. 사채업자는 주소만 올려놨지 실제로는 거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채업자의 어머니 또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인지라 권순찬의 농성은 길어져만 간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여 돈을 대신 돌려주기로 한다.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주민들이 권순찬이 돌려받을 액수를 어렵게 채웠건만, 그는 사채업자를 직접 만나려고 온 것이라며 선의를 거절한다. 이후 주민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권순찬은 구청 공무원들에 의해 몇 차례 천막을 철거당한 끝에 급기야 노숙인 쉼터로 끌려가고 만다. 그러고 얼마 뒤 ‘나’는 권순찬이 만나려 했던 바로 그 사채업자가 외제차를 끌고 아파트에 나타난 것을 목격한다.
이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권순찬을 도우려 했던 주민들의 선의는 미덥기 그지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몇 개월씩 노숙을 해가며 사채업자를 만나려 했던 그의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다. 소설의 정황상 주민들이 온정을 베풀기보다 다만 그를 묵묵히 지켜만 보았더라면, 그래서 온정을 거절한 그에게 냉담해지고 적대적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농성의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여기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나’는 그즈음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할 정도로 “알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 있다. “죽은 아이의 아빠가 단식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뜬 그즈음은 세월호가 진상규명은 가로막힌 채 국민을 분열시키는 프레임으로 악용되던 하 수상한 시절이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자꾸만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그런 자신에게 다시금 화가 나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애꿎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언제나 하 수상한 시절을 통과하는 중이었고, 그 시절을 유예하며 권세를 누리려는 이들이 짜놓은 미로 속에 갇힌 분노를 “애꿎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해소하는 악순환에 항상 사로잡혀 있었다.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우리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을 만큼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애먼 사람들끼리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지 드러날 만큼, 이 사회는 너무나 진부하게 악랄하다. 단지 디테일만 달라졌을 뿐.
‘분노 조절 장애’로 잘 알려진 어느 재벌 총수의 사모님은 철저히 없는 사람들만 골라 패악을 부리는 고도의 ‘분노 조절’을 능숙하게 해내셨다고 한다. 반면 정작 그런 능력이 절실한 사람들은 무의미한 혐오를 서로에게 난사하며 애먼 데 화풀이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일종의 유희로 승화하는 중이다. 그렇게 분노의 거짓 해소는 정교해져만 간다.
그런데 이 분노는 당장 애먼 데 해소하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만큼이나, 을들의 지옥이자 갑들의 천국인 이 미로를 와해할 힘의 원천이기도 할 것이다. 재벌가의 사모님과 따님들에게만 분노 조절이 유용한 것은 아니다. 분노를 받아 마땅한 이들을 향해 정확하게 분노하기 위해, 우리의 혐오를 고쳐 쓰자. 부정적 혐오를 긍정적 분노로 재조정하자.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오늘의 추천 뉴스]
[▶ 블록체인 미디어 : 코인데스크] [신문구독]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