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오래전에는 ‘혁신계’라는 말이 정치권의 진보적 성향의 정치인들을 뜻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의회 진출도 어려웠고, 툭하면 이런저런 ‘시국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지면서 어느 결엔가 ‘혁신’이란 말은 그 ‘진보성’이라는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고 요즘은 아예 그 뜻이 거의 반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요즘의 ‘혁신’은 옛날과 달리 주로 기업에 대해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구조 조정’이라는 말과 흔히 동행한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수를 어떻게 해서라도 줄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러다 보니 기업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의 입에서 ‘혁신’이라는 말이 나오면 또 집단 해고자가 나온다는 신호음처럼 들린다. 세간에서는 그들이 퇴직하고 나와서 자영업을 하면 ‘폭망’의 지름길이라고도 한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어디란 말인가?
기업과 시장에 ‘혁신’이 필요하다고 진단이 내려지면 당연히 외과수술 같은 것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좀 수상한 것은 더 큰 책임이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자본’과 ‘기업주’에 대한 혁신은 아니 하고 오로지 노동자들에게만 칼끝을 겨눈다. 아무도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 같은 것 말이다. 기업주들은 그들의 경영 실책이나 개인 비리가 드러난다 해도 사직이나 구속 한번 시키기도 쉽지 않다.
모든 사회적, 경제적 위기를 별다른 책임과 권한이 없는 약자들에게만 덤터기를 씌우다 보니 ‘혁신’이라는 말의 의미가 변질돼버렸다. 폭탄 피하는 사람은 있어도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그러니만큼 고통의 부담은 진정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각계각층의 ‘이익’을 세밀히 따지며 다시 손질하고 절충하는 일, 그것이 진정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혁신’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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