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 미술평론가 |
최근 평론을 작성하기 위해 모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대화 후 여기저기 둘러보던 중 우연히 카탈로그 한 권을 발견했다. 두께가 꽤 되는 그것은 바로 '미술대전' 도록. 국내 수없이 많은 'OOO미술대전'이나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아무 생각 없이 들춰보는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동시대미술 이전의 방식에 기댄 낡은 언어들이 즐비한 것도 그랬지만 아마추어 그림들과 학생 수준의 작품들이 우수상이니 특선이니 하는 괴이한 상황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운영위원 혹은 초대작가라며 별도로 구성된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할 말을 잃게 했다. 소수를 제외하곤 사회적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은커녕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조차 읽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봤다가 결국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 것 중 하나는 '200페이지가 넘는 도록을 만들기 위해 베어진 나무는 무슨 죄인가'였다. 또한 '작가들은 대체 왜 이처럼 뒤범벅인 무대에 출품할까'였다. 그 어떤 공모전도 과거처럼 군 면제 혜택을 주거나 교수가 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가운데 후자에 대해선 여러 작가들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 작가들의 다수는 전시 기회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허나 설득력이 약하다. 수없이 많은 국내외 기관이 참신한 작품을 찾고 있으며, 정보력에 따라 기회의 부족은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특히 스스로 만든 전시를 통해 화단의 주목을 받은 역대 예술가들의 사례를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는 작품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존중한 결과다.
혹자는 대중이 입상 경력을 높이 본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미술생태와 상의 질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대단하다 여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미 37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거의 모든 미술공모전을 '국전'으로 여기는 세태라면 공모전 입상은 꽤나 남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중이 예술성을 평가하거나 가치를 매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입상하면 뭔가 좀 다르지 않겠냐고 되물을 수 있다. 글쎄다. 공모전은 사실상 권위와 공신력, 이미지의 문제라는 점에서 어떤 공모전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한국 미술계에서 그 세 요소를 고루 갖춘 공모전은 찾기 힘들다. 솔직히 '미술대전' 형식의 공모전 수상 경력이란 아트페어로 뒤덮인 경력만큼이나 의미 있게 여기지 않는다.
'OOO미술대전', 'XXXX미술제', '△△미술공모전' 등과 같은 일부 공모전은 대체로 작가들의 자잘한 욕망을 대가와 바꾼 수익사업에 가깝다. 협회나 단체의 세를 과시하거나 존치를 위해 운영되며, 내부적으론 심사위원과 운영위원, 초대작가 등을 통해 그들만의 카르텔, 미술권력을 보다 견고히 하는 수단이다.
물론 모든 공모전이 같은 꼴을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대개의 경우 '아마추어들의 신분세탁용'이라는 용도를 제외하곤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한 신진작가 등용문이라는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일쑤인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수상하던 떨어지던 자존심만 상하는 공모에 출품료까지 지불하며 목맬 필요 없다. 권위, 명예, 성공, 금전적 이득과 아무 상관없다. '학지코진'(학연, 지연, 코드, 진영)이라는 프레임 내에서 상을 주고받는 데다, 심사받을 사람이 심사하는 공모전이란 그저 에너지 낭비일 뿐이다. 공모전에 출품하느라 신경 쓰고 돈 쓰며 엄한 신작 구작 만드느니 그 시간에 그냥 작품 한 점 더 하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다.
■ 홍경한(미술평론가)
이범종 기자 joker@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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