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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쓰러진 기둥들…광주의 아픔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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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소식에 분노해 그린 `다색`(181.6x228.3cm).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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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꼿꼿하게 서 있던 기둥이 무너졌다. 1980년 단색화 거목 윤형근(1928~2007)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소식에 분노했다. 집 마당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면서 울분을 삼켰다. 하늘을 뜻하는 청색(Blue)과 땅을 의미하는 암갈색(Umber)을 섞어 만든 오묘한 검은색 기둥들이 기울어진 추상화 '다색(Burnt Umber)'을 그렸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의 화폭에서 한결같이 우뚝 서 있던 기둥들이다. 작가는 광주의 비극을 담은 작품 4점을 그린 후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보관해놨다. 그중 미공개 대작 2점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처음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에 나왔다.

쓰러지는 인간 군상처럼 기울어진 기둥에서 물감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예전과 다른 거친 감정 표현에서 작가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다. 4·19세대였던 작가는 1980년 6월 종합교양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인터뷰하면서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죽은 거여"라고 한탄했다.

검은 기둥 사이에 문(門)처럼 보이는 암갈색 여백을 만드는 '천지문(天地門)' 시리즈는 암울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1973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10년 동안 뚜렷한 직업 없이 오로지 작품에만 매진하던 시기에 나왔다. 숙명여고 교사로 재직할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압력으로 재벌 기업 딸이 부정입학한 것을 따진 게 화근이었다. 레닌과 비슷한 베레모 모자를 썼다는 황당한 이유로 반공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뉴욕에서 보낸 장인 김환기 사진 속 모자가 마음에 들어 직접 청바지를 뜯어 재봉틀로 만든 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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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답답한 상황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문을 만든 게 아닐까. 평소 친구들 앞에서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 '이 세상 온갖 묘(妙), 본질과 현상이 나오는 문이다'를 즐겨 읊었다고 한다.

큰 붓으로 그어내린 검은 기둥의 출발은 추사 김정희 서예다. 충북 청주 성리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작가는 작업실에 추사 글씨를 걸어두고 영감을 얻었다. 10년 무직 생활을 추사의 유배에 빗대기도 했다. 면이나 마포, 한지에 오일이 번지는 효과도 동양화 영향이다. 검은 기둥이 강직한 선비 같기도 하고 우직한 고목이나 서까래, 옹기를 연상시킨다.

작품 색채와 형태가 단순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생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잔소리를 싹 빼고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고 표현했다.

그의 화업은 스승이자 장인 김환기를 극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울대 미대 입학시험 감독관이 김환기였다. 그의 장녀 김영숙은 키 177㎝의 윤형근이 절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푸른색 점들이 보이는 초기작은 마치 김환기 작품 같다. 하지만 스승이 하늘 색깔인 블루로 승부했다면 그는 땅의 색깔 암갈색으로 승부했다. 1976년 강원도 오대산 숲길에서 쓰러진 거목이 흙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은 흙으로 돌아간다. 시간의 문제다'고 깨달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윤형근은 너무 큰 작가다. 작품의 스케일뿐 아니라 인품, 살아온 삶, 작품세계를 알면 알수록 깊고 크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16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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