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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럭초의 '주피터스 문'(2일 개봉)은 지난해 칸 영화제에 공개돼 영미권 전문지들에게서 이 같은 찬사를 이끌어낸 영화다. "눈부시게 빛나는 시각적 하이라이트"(할리우드 리포터), "아름답고 유연하며 우아한 카메라워크"(버라이어티).
어두운 조명 아래 담긴 '주피터스 문'의 표현주의적인 인물 구도와 촬영, 미장센은 아름답고도 유려하다. 시작이 반이라고, 난민 청년 아리안(솜버 예거)을 속도감 있게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와 정적인 롱테이크 화면 또한 보는 이의 몰입감을 초입부터 극대화한다.
영화는 21세기 가장 첨예한 문제인 '난민'을 다루는데, 그 소재를 다룬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시퀀스를 보자. 경찰들에게 쫓기던 아리안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유사 아버지를 자처하는 의사 스턴(메랍 니니트제)의 희생으로 호텔 유리창을 뚫고 탈출한다.
스턴은 사실 수용소에 감금된 난민들에게 돈을 받고 이들을 풀어주던 부패 의사였다. 그러던 그가 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 깡마른 청년을 지키려고 한 걸까. 과연 그는 아리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분명한 건, 죽기 직전 그의 표정이 여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의 희생을 발판으로 아리안은 중력을 거슬러 고공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앞서 그를 쏘려던 경찰 라슬로(기오르기 세르하미)마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의아하게도 그는 총구를 거둔다. 왜일까. 여태껏 그는 난민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여기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마저 고개를 돌려 관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제4의 벽의 붕괴. 그 순간 그의 표정은 앞서와는 다른 고요한 기운이 감돈다.
난민 청년이 공중으로 부양하자 세상은 숨죽여 침묵한다. 시끌벅적하던 도심의 차들은 일제히 멈춰선다. 거리의 행인들 모두 저마다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세상은 그렇게 하늘 위로 떠오른 난민 청년을 응시한다. 공포가 아닌 경이감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그런 다음 영화는 묻는 것이다. '저기 저 청년(난민)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냐'고, '그간 우리는 위를 보는 것을 잊고 살진 않았냐'고.
이 세계의 가장 불운한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난민일 것이다. 그 어떤 사회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 텅 빈 인간 생명.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런 그들을 일컬어 '호모 사케르'라고 했다. '주피터스 문'은 이 21세기 '호모 사케르'들의 현실을 지적이면서 우아하게 풀어낸 정치 우화다. SF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 지금 이 세계의 상실된 가치를 조심스레 묻는다. 그 가치라 함은 믿음과 희망,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본연의 가치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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