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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김기천 칼럼] 아시아나항공이 보여준 한국식 경영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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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한국 대기업 중에는 총수의 부인이나 딸들이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는 곳이 있다. 최근 4세 경영시대로 접어든 LG그룹이 대표적이다. LG그룹은 철저한 장자 승계 원칙과 함께 여성의 경영 참여를 배제하는 가풍을 고수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얼마 전까지 LG보다 더 심했다. 선대의 유훈에 따라 ‘아들에게만 주식을 상속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딸들은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주로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형제 간 분쟁 끝에 계열분리한 금호석유화학에서 처음으로 금녀(禁女)의 벽이 무너졌다. 박찬구 회장의 딸 박주형씨가 2012년 12월 다섯 차례에 걸쳐 모두 1만6500주를 매입한 것이다. 2015년 7월에는 대우인터내셔널에서 근무하던 박씨가 금호석유화학의 상무로 자리를 옮겨 금호가(家) 첫 여성 경영인이 됐다.

본가(本家)의 변화는 좀더 더디게 일어났다. 2016년 11월에 박삼구 회장의 부인과 딸이 처음으로 금호홀딩스(현 금호고속) 지분을 각각 2.8%, 1.4%씩 매입했다. 이어 지난 1일에는 딸 박세진씨가 계열사인 금호리조트 상무로 입사했다. 전업주부로 지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직에 올랐다.

보통은 금호가 여성들이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부각되는 게 정상일 것이다. 다른 기업에선 전업주부가 갑자기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른 사례도 있다. 그래서 금수저 논란이 제기됐다고 해도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 아시아나항공의 기내식 사태가 터졌다. 국제선 80편 중 36편은 기내식이 없는 ‘노밀(no meal)’ 운항을 했고, 51편은 지연 출발했다. 사상 초유의 소동을 겪고 있는 와중에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총수의 딸을 특별히 챙겨줬다. 공연히 여론을 들쑤신 꼴이 됐다. 대기업이 그런 정도의 눈치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박삼구 회장의 기자회견으로 여론이 더 악화됐다. 박 회장은 “이제는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해야 하고, 기업에도 참여해야 한다”며 “예쁘게 봐달라”고 했다. 취업난과 성차별, ‘유리 천장(glass ceiling)’ 같은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대다수 여성들을 자극할 수 있는 구차한 해명이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아들은 경영에 참여하는 게 당연하고, 딸은 안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마찬가지로 아들이든 딸이든 총수의 자식이라고 해서 경영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곧바로 임원으로 발탁하는 것 역시 터무니 없다. 기업을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는 구시대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낡은 기업관을 보여준다.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사태도 근본원인은 기업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 있다. 경영 실패로 그룹이 해체된 뒤 ‘내 것’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기내식 업체를 교체한 게 화근이 됐다. 이번 사태가 아니더라도 또다른 형태의 위기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박 회장은 지난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잇따라 인수하며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재계 7~8위까지 끌어올렸다. ‘M&A의 귀재’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모래성이나 다름 없었다.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무리한 차입의 후유증으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다시 내놨고, 금호산업 등도 워크아웃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우선매수청구권이라는 특혜 덕분에 재기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재계에서 가장 탄탄한 혼맥·인맥이나 특정지역 대표 기업의 상징성 덕분이라는 등의 여러 추측이 있다. 어찌됐든 박 회장은 2015년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금호산업을 되찾으며 그룹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어 박 회장은 금호타이어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했다. 기내식 공급업체에 아시아나항공이 아닌 금호홀딩스에 1600억원을 투자해줄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대신 중국 하이난항공과 손을 잡았다. 누가 봐도 납득하기 힘든 불투명하고 수상쩍은 거래가 이뤄졌다.

금호타이어 인수는 실패했고, 아시아나항공은 ‘상처’를 입었다. 아무 문제 없던 기내식 업체를 교체했다가 사고가 터졌다. 그동안 그룹의 돈줄 역할을 한 후유증으로 재무구조가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올해 1분기말 현재 부채비율이 600%에 이르고, 내년에 새 회계기준이 적용되면 1000%에 육박할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경영 실패의 피해가 고객과 주주, 직원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 와중에 벌어진 금수저 낙하산 인사에 대해 박 회장은 “여성의 사회 진출”이라고 미화했다. 이런 엇박자와 부조리가 기업의 신뢰도를 더 떨어뜨리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박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나선 배경이다.

대한항공에 이어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의 촛불 시위는 한국식 경영의 그늘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기업은 누구의 소유인가’, ‘기업의 존재 이유는 뭔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기업 스스로 구멍가게 수준의 전근대적 기업관과 결별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철학과 비전, 지혜가 절실하다.

조선비즈 논설주간(kck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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