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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화)

[분수대] 계엄령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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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현상 논설위원


민주화 열기가 끓어오르던 1987년 6월. 최루 연기 가득한 시위 현장에서는 ‘계엄령 설’이 돌았다. 성난 파도 같은 시위를 경찰력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9일 오전 군 관계자들을 불러 다음날 새벽 4시를 기해 병력 출동을 지시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이를 유보했다. 그는 훗날 “극단 세력에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직선제 수용을 망설이는 노태우(당시 민정당 대표)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양동작전이었다”(『전두환 회고록』)고 말했다. 애초부터 군 동원 생각은 없었지만 일종의 ‘쇼’를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미국의 반대, 국민 저항, 군의 항명 가능성을 고려했을 것이다.

정부 수립 이후 계엄령이 선포된 사례는 열 번이다. 1948년 여순사건 때문에 여수·순천 일대에 내려진 계엄령이 최초다. 이후 4·19혁명, 5·16 군사정변, 10·26 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등장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네 번, 박정희 시대 네 번, 전두환 시대 두 번이다. 계엄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때 군 병력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악용된 경우가 많아 대다수 국민은 모골이 송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한 5·17 전국 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역사 속 단어가 됐던 ‘계엄령’이 다시 등장했다. 한 여당 의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기각 이후 계엄령 선포를 기획했다는 기무사 문건을 공개하면서 논란이 불붙었다. 군인권센터는 구체적 부대 동원 계획이 적시된 문건까지 공개했다. 인터넷에서는 “촛불시위 나갔다가 다 죽었을 뻔. 후덜덜” 같은 댓글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런 의혹이 과장됐다는 반박도 나온다. 문건은 ‘탄핵 결정 이후 폭도들의 경찰서 무장 탈취, 국가 기간시설 습격, 경찰의 치안유지 기능 상실’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전제했다. 탄핵 기각 상황뿐 아니라 인용에 따른 혼란도 상정했다. 촛불 세력뿐 아니라 태극기부대에 대한 경계도 담겨 있다. 실행을 염두에 뒀다기보다는 비상 검토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문건을 만든 사람이나, 폭로한 측이나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군이 나설 수 있다고 봤을까. 국민소득 1600달러였던 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일이 3만 달러 언저리 시대에서도 가능했을까. 그랬다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가만 있었을까. 군인들은 순순히 말을 들었고, 우리 국민은 그냥 숨죽였을까. 문건 작성과 폭로 경위를 모르고서야 이런 상상은 그냥 부질없는 소설일 뿐이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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