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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출산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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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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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 ‘워크 체인저’(work changer) 콘퍼런스에 발언자로 나섰다. 내 발언의 마무리는 이랬다. “과거에 100명어치의 노동을 동원해야 생산할 수 있었던 재화를 이제 그보다 훨씬 적은 인원의 노동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숫자는 앞으로도 줄어들 것이라고들 합니다. 재화를 생산하는 데 인간이 점점 필요 없어진다면, 이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의미’가 아닐까요. 의미는 사람들이 서로 발견해주고 인정해줄 때만 유효한 것입니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 한 청중이 물었다. 재화 생산에 사람이 점점 적게 필요하다면,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든다고 문제일 것은 없지 않으냐고.

새로운 돌봄에 대한 상상을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출생한 아이는 약 36만 명이었다. 2016년 41만 명보다 11.9% 줄어든 숫자로 감소폭도 2001년 이후 1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2005년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을 제정하고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를 발족했다. 그 후로 12년간 예산과 정책을 쏟아냈지만, 출산율의 하락 추세는 전혀 반전되지 않았다.

나는 작년 말부터 위원회의 민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민간위원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아니 왜 나 같은 사람을?”이라며 의아했다. 고사를 거듭하다가 결국 수락한 것은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뜻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혼인 부모+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의 프레임, 가부장제와 산업화 시대의 생산주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미래를 상상하는 목소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 직접 발언할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반년이 좀 넘게 지난 지금, 우리에게 “그래서 어떤 미래를?”에 답할 준비가 없다는 걱정이 더 깊어졌다. 이제까지의 저출산 대책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정책으로 논의가 내려가면 여전히 과거 프레임에 머물고 만다. 저출산과 고령사회를 방지해야 할 추세로 전제한 채, 아이를 낳기 어렵거나 낳아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세세한 혜택을 논의하는 데만 시간을 쏟고 있다(물론 전반적인 복지의 수준을 높이는 정책들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80년대 이후 출생한 여성 인구는 이미 정해진 모수다. 합계출산율을 현재의 1명가량에서 아무리 늘린다고 해도 단기간 내 얼마나 획기적 변화가 있겠는가? 저출산 추세를 성공적으로 반전시켰다는 프랑스도 합계출산율을 0.25명가량 올리는 데 20년쯤 걸렸다. 더구나 지난 12년간 이미 훨씬 적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현실을 바꿀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대대적인 이민 인구 유입을 가정하지 않는 한, 인구 축소 사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미래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다면, 중요한 것은 정해진 인구 축소의 미래를 잘 대비하기 위한 정책이다. 인구가 줄더라도, 그 사회 안에서 개인이 누리는 행복이 줄어들라는 법은 없고, 행복의 축소를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 새로운 돌봄,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히려 축소 사회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저출산 추세도 반전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살아갈 행복한 미래

4월 초의 그 콘퍼런스에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도 저출산 자체가 문제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구가 지금보다 적은 것이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겠죠. 다만 하락 추세가 너무 빨라서 사회가 그런 급격한 변화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발표가 끝난 뒤, 한 중년 남성이 결연한 얼굴로 다가와 명함을 내밀면서 걱정을 토로했다. “인구가 줄어들면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는데요, 저출산이 문제가 아니라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을 돌려드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라는 없어지지 않을 거예요.”

수백 년 뒤 나라가 없어질까 두려워 아이를 낳을 사람은 없다.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살아갈 미래를 행복하게 상상할 수 있어야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다.

제현주 일상기술연구소 책임연구원

*제현주 책임연구원의 ‘노 땡큐!’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지면을 빛내준 제 책임연구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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