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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일)

AI시대, 기본소득이 잉여인간을 구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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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스위스는 기본소득제 도입을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부결됐고, 최근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역시 벽에 부딪혔다. 【블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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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논쟁의 한복판에 있지만, 점점 더 화력이 뜨거워질 논의가 있다. 기본소득 이야기다.

"기본소득은 필수가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의 말이다. 논의의 한쪽에는 이 밖에도 마크 저커버그 같은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이 서 있다. 인공지능과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잉여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절대다수 인류를 구원할 해법은 기본소득뿐이라는 주장. 그들 반대편에는 현실주의자들이 서 있다. 언제, 어떻게가 중요하며 아직은 이르다는 반론. 최근 핀란드의 한 도시에서 세계 최초로 실시된 기본소득 실험도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적절한 시기에 기본소득의 바이블과 같은 책이 번역 출간됐다. 기본소득 운동 주창자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전신인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와 젊은 학자인 야니크 판데르보흐트가 12년에 걸쳐 쓴 책이다. 저자들은 왜 보편적 기본소득이 이 시대 위기를 타계할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지,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무엇인지 차분하게 논증한다.

"19세기가 노예 해방, 20세기가 보편적 선거권 도입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기본소득의 세기가 될 것이다."

판 파레이스의 말이다. 이 책은 기본소득의 윤리적 정당성, 경제적 지속가능성, 정치적 달성 가능성을 차례로 짚어본다. 저자가 제시하는 기본소득의 원칙은 '모든 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현금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를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더라도 실업과 노동의 불안정성을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 말이다.

심지어 부유한 국가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할 것인가라고 질문하며, 기본소득은 실업문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은 "우리는 얼마 되지 않는 양의 버터를 빵 전체에 묻히기 위해 얇게 펴 발라야 하듯이,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일자리를 가급적이면 광범위하게 나눠 여러 사람이 참여해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본소득은 개인이 스스로 노동시간을 쉽게 줄일 수 있도록 하며, 동시에 이로 인한 소득의 손해를 줄여준다는 것. 또한 기존 복지제도가 지닌 행정적 비효율을 줄여준다는 논거를 내세운다.

물론 반론은 다각도로 제기될 수 있다. 먼저 재원 조달을 위해 증세가 이뤄지면서 노동 공급에도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주장. 이에 대해 저자는 "근로소득 말고도 사람으로 하여금 일을 잘하고 싶도록 만드는 동기는 다양하다"면서 "어떤 공동체가 사회적 평등 상태에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적은 양의 소득만 얻게 된다고 해도 열심히 일하려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얻게 될 것"이라고 반론한다.

저자의 목소리 중에서 귀 기울여볼 만한 지점은 기본소득을 하루아침에 실현하자고 주장하지 않고, 실용주의적이고 점진적인 접근법을 채택하자고 주장하는 점이다. 순수주의야말로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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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18세기 말 이후 걸어온 길에 대한 역사적 개괄도 만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 벌어진 기본소득 논쟁, 보장소득을 두고 1960년대 대립했던 로버트 시오볼드와 밀턴 프리드먼, 제임스 토빈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주장 등을 소개한다.

책의 마지막장에서 던지는 질문은 '지구화 시대에 가능한가'이다. 이 책은 '지구화'야말로 결국 기본소득 논의에 치명적 타격이 될 것임을 인정한다. 장밋빛 전망으로만 가득 차지 않은 이 책은 역설적으로 기본소득이 일, 노동, 여가, 소득, 가족, 사회, 국가의 성격과 본질을 다시 정의하게 하는 철학적인 논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려준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과 자유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추천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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